[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알아야 면장(面長)?

입력 2015-05-0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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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가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는 담뱃갑 속 은박지를 모아 연습장을 만들어 주셨다. 화장실에선 손바닥 크기로 자른 신문지를 사용했다. 연말에 은행 등에서 달력을 선물받으면 반을 잘라 새 학년 교과서의 겉장을 정성껏 쌌다. 1970~80년대 귀한 게 어디 종이뿐이랴. 어머니는 저녁마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맸고 아버지는 몽당연필을 볼펜 끝에 끼워 주셨다. 다섯 남매의 중간인 나는 새 옷, 새 신발, 새 학용품을 갖는 게 소원이었다.

과거에 비해 풍요로워진 요즘 우리 주변에는 버려지는 것들 천지다. 옷을 물려입기는커녕 유행이 지났다고 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연필, 공책 등 학용품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아파트 구석엔 멀쩡한 가구들이 버려져 있다. 1995년 쓰레기 분리수거제가 시행된 지 20년. 자원 재활용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지만 아직도 재활용품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지난주 우리 아파트 재활용품 분리 배출날에 50대로 보이는 부부가 큰 상자를 들고 나왔다. 아주머니의 말(내가 듣기엔 명령)에 따라 자루에 재활용품을 구분해 넣던 아저씨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말로 다 하냐!” 그러자 아주머니가 더 큰 소리로 맞받아쳤다. “알아야 면장이라도 하지. 당신이 혼자 할 수 있어? 오늘은 내가 면장이야!” 순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의 ‘면장’이 면(面)사무소의 행정을 주관하는 면장님일까? 내 고향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선 ‘면 서기’만 해도 굉장히 똑똑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그러니 면장은 그보다 훨씬 더 지식이 풍부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면장보다 직급이 높은 군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이 알아야 앉을 수 있는 자리인가. 이쯤되면 면장이 ‘面長’이 아닌 다른 심오한 의미가 담긴 말임을 알아챘으리라.

답은 공자(孔子)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 말은 논어(論語) ‘양화(陽貨) 편’에 나온 것으로, 공자는 어느 날 배움을 게을리하는 아들 리(鯉)에게 일침을 놓는다. “사람이 되어서 배우지 않으면, 마치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처럼 미련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人而不學,其猶正墻面而立]사람은 공부를 하고 익혀야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즉, 아는 것이 부족해 벽을 보고 있는 듯 답답한 마음은 면장(面牆)이고, 공부에 힘써 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면면장(免面牆)이다. 여기서 ‘面’이 탈락되고 ‘免牆’만 남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정확한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면(免)자를 버리고 ‘면장’(面長)으로 잘못 쓰면서 혼란을 일으켰다.

‘알아야 면장을 하지’는 상대방이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일 따위를 엉뚱하게 처리할 경우 그의 지식 수준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또 스스로 부족할 때의 답답함을 말할 때도 쓴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면 많이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는 것이 많아도 면장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사람으로서의 기본 도리가 아닌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인기와 돈만 좇는 정치인과 학자들은 좀 뜨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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