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배워서 아는 사람은 옛일을 널리 알고 현재의 일에도 두루 통한다. 바로 박고통금(博古通今)이다. 이와 달리 배운 것을 남에게 전하기만 할 뿐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공부가 있다. 학문을 입과 귀로만 하는 구이지학(口耳之學)이다.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에 이렇게 씌어 있다. “(구이지학은) 소인의 학문이다. 귀로 들은 것이 입으로 나온다. 입과 귀 사이는 네 치일 뿐이다. 어찌 일곱 자의 몸에도 채우지 못하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出乎口 口耳之間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軀哉]
구이지학과 비슷한 말이 기문지학(記問之學)이다. 옛글을 외운 다음 배우는 자의 질문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아는 데 한계가 있고 남의 스승이 되기에 부족하다[記問之學 不足以爲人師]. 예기 학기(學記)에 나오는 말이다. 스승과 질문에 관해 논한 대목인데, 記聞之學이라고 표기한 자료도 있지만 원전은 그게 아니다.
이에 앞서 “물음에 잘 대답하는 자는 북을 두드리는 것과 같아서 작은 것으로 두드리면 작게 울고 큰 것으로 두드리면 크게 운다”는 말이 나온다. 기문지학은 외워서 읊기만 하는 기송지학(記誦之學)과 같은 뜻이다.
논어 양화(陽貨) 편에 나오는 도청도설(道聽塗說)도 비슷한 말이다. 공자는 “길에서 들은 것을 길에서 옮기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孔子曰 道聽塗說 德之棄也]이라고 했다. 좋은 말을 마음에 간직해 수양하지 않고 바로 남에게 말하는 것이 구이지학과 다를 바 없다.
춘추시대 제 나라의 재상 관중의 언행을 기록한 ‘관자(管子)’에는 비이장목(飛耳長目)이라는 말이 나온다. 문자 그대로 먼 곳의 일을 잘 보고 사물을 깊이 관찰하며 널리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학문을 하는 자세와 방법으로 새길 만하다. 장목비이(長目飛耳)라고 앞뒤를 바꿔 쓰기도 한다. 장목은 눈을 크게 부릅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