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태생을 논하기에 앞서 ‘욕심’이라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욕구에 대해 얘기해보자. “당신은 욕심쟁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욕심의 범주는 어디까지 용납될 수 있을까? 남에게 잣대를 들이밀 때는 단호하다가도 나에게 잣대가 돌아오면 지극히 합리화되는 것이 인간이기에 어디까지가 인간으로서 납득 가능한 욕심이며, 어느 수위를 벗어날 때 비로소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욕심인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객관적으로 선을 긋기가 쉽지 않다.
부정부패를 일삼고도 고작 몇 십만 원밖에 가진 것이 없다던 전직 대통령의 행태는 누가 보더라도 욕심의 선을 끝도 없이 초월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발견한 1000원짜리 지폐를 자기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는 한 소년을 보자.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법한 일이기에 그 소년의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까지 들리는 듯 애처롭기만 하다. 이처럼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1000원짜리 지폐를 숨길 때 들렸던 소년의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이 전제돼야 지극히 인간적인 욕심의 범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몇 십만 원이 전 재산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세 치 혀로는 더 이상 인간적인 욕심을 논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욕심(慾心)’의 정의를 고등학교 화학 수업시간에 배웠던 분자구조의 ‘안정화(stable) 이론’에 대입해 생각해보자. 분자 하나가 있으면 불안정하지만 좌우로 새로운 분자가 쌍을 이뤄 대칭을 이루면 안정적인 것처럼, 하나를 이루면 또 다른 하나를 원하고, 2개가 생기면 또 다른 2개를 찾게 되는 일종의 무한반복이 바로 욕심의 자기합리화인 것 같다. 반복이 무엇을 위한 반복이고, 충족이 무엇을 위한 충족인지를 모른 채 그 이유를 불안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둘을 하나씩 나눌 생각은 하지 않고 또 다른 2개를 가져야만 비로소 안정화된다고 자기 스스로 세뇌한다. 그렇게 늘려 나간 이후에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시 줄여 갈 수 있다고 단언하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말 그대로 어렵던(?) 시절에 대한 본전 생각에 분배와 나눔을 실천하기는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다. 비로소 ‘욕심’, 그 놈이 찾아온 게다.
욕심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지만 객관적인 선을 넘기면 위험하다. 공평하게 반을 나누고도 남보다 하나를 더 많이 가지지 못해 분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욕심쟁이다. 비즈니스에서도 선을 넘는 욕심의 예는 수두룩하다. 계약서가 버젓이 존재하지만 일이 잘못됐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일이 승승장구로 잘 펼쳐질 때도 분배가 공평하지 않다며, 처음부터 기준과 계약이 잘못 시작됐다며 합의된 기본 틀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자신의 파이가 작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기존의 틀을 부정하면서까지 자기 이익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상황은 비즈니스를 떠나 인간으로서도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계약이란 둘 사이의 합의가 전제된 신뢰의 결정판이다. 혹여 잘못된 계약임을 알았더라도 이는 자신의 불찰을 반성하고, 상대방에게 재고(再考)의 여지를 논의할 차원이지 신뢰의 틀을 넘어서 기본 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욕심’의 범주가 아니라 ‘억울’한 상황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하지 않았던가. 사회 초년생 때의 한 번의 뼈저린 아픔이 돌고 돌아 비즈니스에서는 큰 버팀목이 되는 것처럼 상대방과의 계약 번복을 통해 욕심 많은 사람으로 오해받기보다는 자신의 작은 불찰이라 받아들이며 반성하는 자세가 새로운 비즈니스에는 더 큰 열매를 가져온다. 욕심도 억울함도 나눔이 밑바탕이 돼야 돌고 돌아 자신도 모르는 새 신뢰라는 큰 응원군을 만들어온다. 당신은 욕심 많은 비즈니스맨인가? 이제는 욕심도 통 크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비즈니스맨으로 대접받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