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은 22일 비례대표 후보 36인을 발표했다. 그중 비례 2번을 받은 김종인(77)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누구일까.
‘경제민주화’ 전도사로 알려진 김 대표는 1940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의 손자이기도 하다. 김 대표는 중앙고를 졸업하고 한국외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공부를 한 뒤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에는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지냈다.
김 대표는 19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만든 초헌법적 반민주기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재무 분과위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국보위는 신군부 반대세력들을 처단하는 일들을 추진했다. 정치활동 규제, 삼청교육대 발족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유신정권에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재벌개혁론자로서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119조2항) 신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청와대 경제수석 시절에는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재벌들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강제 매각시키는 ‘5·8조치’를 단행하기도 했다. 역사상 가장 강도가 높았던 재별 규제였다. 부동산을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와다.
‘경제통’으로 승승장구했던 그는 1991년 12월, 청와대 찾아온 안영모 동화은행장으로부터 “은행장 연임이 가능하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듬해 3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2억1000만원을 받았다. 김 대표는 이같은 혐의로 1993년 구속돼 의원직을 상실하기도 했다.
‘야인’이 된 이후 경제부총리 혹은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 등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지만 입각에 실패하기 일쑤였다.
김 대표는 2010~2011년 안철수 대표의 ‘청춘콘서트’ 게스트로 종종 출연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았다. 당시 안 대표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김 대표를 꼽기도 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새누리당 합류였다. 그는 제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경제민주화 아젠다를 설계했다.
새누리당은 ‘경제통’인 김 대표의 힘으로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해 결국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뒤 경제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토사구팽 당한 김 대표는 “국민들에게 미안하다” “내가 너무 과욕을 부렸다”는 등 실망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경제민주화는 이렇게 잊혀져갔다. 그리고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당 대표직을 물러나면서 ‘바통’을 김 대표에게 넘겼다. 김 대표와 지근거리에 있는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는 문 대표의 ‘러브콜’을 받기 전까지 저술활동에 주력했다.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2’가 출간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최근 더민주는 공천을 둘러싸고 내홍에 휩싸이기도 했다. 김 대표의 비례대표 순번을 놓고 여러 말이 나와서다. 논란이 증폭되자 김 대표는 당무거부에 돌입하는 등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갈등이 봉합되는 모양새지만, 당내 계파 간 갈등의 불씨는 쉽사리 꺼지지 않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