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 ‘아니다’로 일관하는 행태는 정부부처나 산하기관도 비슷합니다. ‘최순실’이라는 단어와 연관된 모든 것을 지우기 시작한 것인데요. 최순실 씨 측근 차은택 씨에게 휘둘렸던 문화체육관광부는 대대적인 고위 공무원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산하기관도 조직개편을 시작으로 허둥지둥 차은택 지우기를 시작했습니다. 최순실 씨에서 차은택 씨로, 또다시 차은택 씨의 측근들로 이어진 전횡을 감추기 시작한 것이지요. 일부 조직은 이 과정에서 ‘증거인멸’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래창조과학부 역시 구속기소된 차은택 씨가 앉아 있던 문화융성담당 ‘민관합동 창조경제추진단장’ 자리를 폐지키로 했습니다. 법까지 개정해 차은택 자리를 마련하더니, 거꾸로 법을 또 개정해 그가 앉았던 자리를 없애기로 한 것이지요. 담당부처인 미래부는 시행령 개정안을 확정하고 입법예고와 법제처 심사 등을 거쳐 상반기 내 이 자리를 없애기로 했습니다.
앞서 시행령 내 단장 위촉 자격을 보면 ‘단장은 창조경제 및 문화 관련 민간전문가 중에서 위촉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요. 이 조항에서 ‘문화’라는 단어도 삭제할 예정입니다.
민간 기업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KT 황창규 회장은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되며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재임 기간 성과가 좋아 연임을 기대하던 무렵이었지요. 황 회장은 비선실세의 청탁을 받고 차은택 씨의 측근을 마케팅 임원으로 채용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최순실 씨가 실소유한 회사에 70억 원에 달하는 광고를 몰아준 것도 검찰 수사결과 확인됐습니다. 연임을 노린 황 회장에게 임기말 청와대의 청탁, 아니 압력은 쉽게 거부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황 회장은 권력과 비선실세에 휘둘렸지만 여전히 연임을 노리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의 경영 성과가 긍정적인 데다, 정권교체 가능성이 제기된 마당에 적당한 후임자가 없다는 현실이 그의 욕심을 부추겼으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과거 남중수 전 회장이 정권 교체 직전, 무리하게 연임을 시도했다 차기 정권의 보복을 받았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겠지요. 황 회장의 앞날도 지켜볼 일입니다.
CJ 역시 부지런히 차은택 씨의 흔적을 지우고 있습니다. CJ가 K컬처밸리 사업을 추진하던 과정이 차은택 전횡에 연루된 탓인데요. 경기도 일산에 추진하던 K컬처밸리 사업에 사실상 싱가포르 페이퍼 컴퍼니가 동원됐다는 의혹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의회가 특위를 구성하고 싱가포르 현지 조사까지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차은택 흔적 지우기는 정부나 기업 모두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꼬리 자르기’에만 급급하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스스로 과오를 먼저 인정하고 이를 바로잡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순서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