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해봤어?”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도전 정신이 녹아 있는 말이다. 대내외 불확실성으로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 아산(峨山) 16주기를 맞아 그의 리더십이 새롭게 재조명받고 있다.
아산은 요즘 말로 치자면 ‘흙수저’다. 강원도 산골짜기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소학교를 겨우 마쳤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던 그는 열여섯 되던 해 소 판 돈 70원을 들고 상경했다. 공사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모으던 아산은 힘들 때마다 ‘시련이란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다짐하며 자신을 더 채찍질했다.
인천서 막일꾼으로 품을 팔던 아산은 이후 복흥상회(쌀가게)에 취직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가장 먼저 나와 문을 열었고,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었다. ‘운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게으른 것’이라고 여겼다.
아산의 성실함을 눈여겨봤던 쌀가게 주인은 그에게 가게를 넘겼다. 첫 홀로서기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총독부가 쌀 배급제를 시작하면서 간판을 내려야만 했다. 너무 빨리 찾아온 시련이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곧바로 아산서비스공장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 물론 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애써 꾸민 공장엔 불이 났고, 늘 자금난에 시달렸다. 조선총독부는 공장 허가를 빌미로 몽니를 부렸다. 결국 아산은 개점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런데 두 번의 실패를 거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아산은 ‘장사꾼’이 됐다. 성공하는 법과 실패하지 않는 법을 모두 터득한 것이다.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잇달아 설립한 그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6·25전쟁 때는 미군 숙소를 지어 돈을 벌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하며 회사를 키웠다.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바클레이즈 은행을 찾아가 차관 도입과 선박 수주를 성사시켰고, 전쟁의 상흔이 지워지지 않은 황량한 땅에 290일 만에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냈다. 서부 간척지 공사를 위해 폐선을 가라앉히고, 포드와 헤어져 독자기술로 ‘포니’도 개발했다. 그렇게 아산은 한국 경제성장의 산증인으로 남았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생전에 “세계적으로 뛰어난 기업가들이 많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정주영은 그 누구보다 빛난다”고 평가했다.
한편 아산 16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20일, 저녁 7시께부터 시작된 제사에는 범현대가 일가가 대거 참석했다. 정 명예회장의 차남인 정몽구 회장을 비롯해 6남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7남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8남 정몽일 전 현대기업금융 회장 등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