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아들 손을 잡고 매일 같은 시간에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타야 할 버스 번호를 불러준다. 서로 옷깃을 여며주며 추위를 걱정하는 모습이 다정하다. 버스 앞 문이 열리면 운전 기사 얼굴을 확인하고 익숙한 얼굴인 듯 “아저씨, 안녕하세요”를 외치다시피 건넨다.
이 모자와 함께하는 출근길에 익숙한 또 한 가지가 있다. “어휴, 아침마다 다 큰 애를 데리고 고생이네”, “엄마가 맘 편할 날이 없겠어”, “저런 것 두고 어찌 눈 감나”, “그냥 집에나 있지” 등 모자를 향해 던져지는 ‘말(言)’들이다. 어머니는 매번 앙다문 입술로 창 밖을 보거나 아들 얼굴을 매만진다.
나 역시 ‘걱정’ 또는 ‘위로’라는 미명하에 30여 년간 들어온 말이 있다. 부모님과 수화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거나, 부모님께서 청각장애인이셔서 들리지 않으니 제게 말씀해 달라 요청하면 “크면서 힘들었겠네”, “딱해라”, “딸이 고생 많네” 등 들을 때마다 불편하고, 들을 때마다 속상한 몇 마디들이다. 혹자는 “뭘 그리 예민하게 구느냐”, “다 걱정해서 하는 말 아니겠냐”라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이 내뱉는 사람의 의도보다 듣는 사람의 마음이 우선돼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자연스레 말에 무뎌지는 것도 아니다.
“살 조금만 더 빼면 딱 좋을 것 같아. 다 네 건강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나이 더 차면 혼기 놓친다. 노산도 얼마나 위험한데”, “젊을 때 고생, 사서 한다지만 그 좋은 직장 그만두고 뭐하려고”, “아이 학교 갈 때는 엄마가 옆에 있어 줘야 하는데”, “더 치열하게 살아도 모자라다”, “가장의 무게가 원래 그렇게 무겁다” 등등.
일상 곳곳에서 무심결에 듣는 수많은 걱정들 중 온전하게 와닿는 것이 얼마나 될까. 당신이 상대를 걱정하는 맘에서 꺼내는 그 말은 숨 한 번 들이마시듯 입 안에 간직해도 좋다. 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냐고? 바로 그거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은 입 안에 담아두고, 그 걱정마저도 당신의 걱정으로 남겨 놓으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