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어릴 때 기억은 겨울날 여덟 살 손위 누님 등에 업혀 있던 내 모습이다. 세 번째 남동생인 나를 돌보는 건 열 살도 채 안 된 누님 몫이었다. 목덜미가 하얗게 비치는 단발머리에 치마저고리 차림의 누님은 포대기로 나를 업고 추위도 잊은 채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니면 추위를 잊기 위해 나의 무게도 잊은 채 고무줄을 넘었거나. 폴짝폴짝 고무줄을 넘을 때마다 돌을 겨우 지났을 내 고개도 흔들렸다.
초등학교 입학 즈음도 자주 떠오른다. 6·25로 폐허가 된 자리에 임시로 지은 교실은 초가지붕에, 책상 줄을 절대 맞출 수 없는 울퉁불퉁한 흙바닥이었다. ‘율동시간’에는 1학년 모두가 운동장에서 짝을 지어 포크댄스를 췄다. 해지고 색 바랜 무명 치마저고리 차림의 내 짝은 못 먹어서 비쩍 말랐고, 누런 콧물을 훌쩍였다. 그 아이와 짝 된 게 싫어 먼저 손을 빼는 내 얼굴엔 버짐이 피어 있었다.
겨우 골목 하나 사이일 뿐인데도 우리 편, 네 편으로 나눠 나무칼을 휘두르고 돌멩이를 던지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벌였던 ‘동네 전쟁’도 뇌의 주름에서 꺼내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자전거 체인, 쇠파이프 등 더 위험하고 더 무서운 ‘무기’를 들고 나섰던 동네 형들은 머리가 깨지고 피가 마르지 않았는데 몇 분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됐을 것이다. 된장도 귀했던 시절, 상처는 제대로 아물렸나 모르겠다.
전쟁은 다른 것도 기억 속에 묻어 놓았다. 고향 앞 낙동강 모래밭에서 ‘괴뢰군’의 방망이 수류탄을 주워와 친구 집 아궁이 옆에서 돌멩이로 분해하려던 우리를 본 친구 어머니의 기겁하던 표정이 생생하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지금 나는 살아 있지 않거나 심각한 장애로 가족에게 큰 짐으로 남았을 것이다. “무기가 어디에나 널려 있어 원하는 자는 누구든 무기를 가질 수 있을 때가 전쟁이 끝난 때”라고 어느 소설가가 썼는데 정말 그런 때였다.
전쟁 때문에 고아가 많았다. 교실에도 많았고, 동네에도 많았다. 고아들은 대체로 사나웠다. 이북에서 피란 온 집 아이들도 사나웠는데, 그들과 고아들은 동네 아이들이 숫자의 힘을 믿고 텃세를 부려도 절대 피하지 않고 싸웠다.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훨씬 많은 아이들에 맞서 싸우는 모습이 떠오른다. 더는 못 물러선다는 각오가 없었던들 그렇게 처절하게 맞섰을까. 악착같이 싸우던 아이들 중에는 할머니 홀로 키우던 얼굴 검은 혼혈 친구도 있었다.
‘풍요’의 기억은 중학교 1학년 무렵이 처음이다. 계란 한 개를 혼자 먹는 것은 꿈도 못 꾸던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계란이 흔해졌다. 나만 누린 풍요는 아니었다. 나처럼 매일 도시락 밥 위에 ‘계란후라이’를 얹어오는 아이들이 나날이 많아졌다.
수출 1억 달러 달성 기념식도 눈앞에 그려진다. 계란이 흔해지기 직전이었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기념식을 중계하는 아나운서가 “기적”이라며 목메어 울부짖던 소리는 지금도 쟁쟁하다. 라디오로 그 소리를 들으며 모두가 이제는 잘살게 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난해 수출액은 5000억 달러였다.
“우리의 뇌는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은 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은 누가 한 것인가. 상상도 못할 만큼 잘살게 됐는데 못살고 힘들었던 그때의 ‘나쁜 기억’이 왜 자꾸 떠오르나. 나라 돌아가는 판세가 그때로 다시 돌아갈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어서인가. 경로우대증을 받으려니 자꾸 과거로 돌아간다.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서라도 65세가 아니라 더 늦게, 만 70에나 경로우대증을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