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가 총기 규제를 놓고 둘로 갈라졌다.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전미총기협회(NRA)의 존재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달 14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 주의 한 고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 이후 미국 내에서 총기 규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동안 규제에 회의적이었다. 총격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트럼프는 그 원인을 정신병에서 찾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론이 악화하자 지난주 ‘범프 스톡’을 금지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범프 스톡은 소총을 기관총 식으로 바꾸는 장치를 뜻한다. 범프 스톡 금지 규제를 만듦으로서 일반 총기를 쉽게 자동화기로 바꿀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다만 이 규제가 총기 사고를 예방하기에는 부족한 대책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었다. 지난달 28일 트럼프는 여야 양당 의원들과 회동한 자리에서 총기 규제법 채택을 추진하겠다고 강경한 기조를 보이기도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총기 규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NRA의 막강한 힘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주지사들을 만나 “NRA는 걱정하지 말라”며 “그들은 우리 편”이라고 말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총기 규제 여론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면서도 총기 협회를 달래는 성격의 발언을 한 것이다.
NRA는 총기 애호가들로 구성된 시민단체이자 미국에서 강력한 3대 로비 단체 중 하나다. 동시에 미국 최대 보수세력으로 여당인 공화당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남북전쟁 당시인 1871년 출범해 147년간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퓨리서치에 따르면 작년 기준으로 회원은 500만 명에 달했다. “Guns do not kill people, people kill people (총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라는 구호로 내세워 총기 규제에 반대한다.
특히 이들이 믿고 있는 건 수정헌법 2조다. 1791년 발효된 수정헌법 2조는 ‘무장할 권리’가 명문화돼 있다. 많은 미국인이 총기 소유가 기본권리라고 믿는 이유다. NRA도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권리’를 근거로 총이 오히려 개인과 가족, 공동체를 지켜준다고 여긴다. 총기를 규제하는 것은 수정헌법 2조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NRA는 아메리칸아웃도어브랜즈, 레밍턴암스와 같은 총기업체로부터 금전적인 지원도 받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공화당 보수층을 결집하고 직간접적으로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해 조지H. W부시, 로널드 레이건,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등 총 9명의 전 대통령이 NRA 회원이다.
막대한 회원 수를 무기로 NRA는 기업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최근 대형 민영은행인 퍼스트내셔널뱅크오브오마하가 NRA와 제휴해 발행하던 비자 카드 발급 서비스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이 은행은 NRA와 10년 넘게 파트너십을 맺어 왔다. 렌터카 업체와 보험 업체들도 여론을 의식해 NRA와의 제휴를 끊고 있지만, NRA의 입김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처지다.
NRA와 제휴 중단을 선언한 델타항공은 맞보복을 당할 위기다. 앞서 델타항공은 보이콧에 동참해 NRA 회원에게 제공하던 할인 혜택을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26일 포춘에 따르면 공화당의 케이시 케이글 조지아 주 부시장은 델타를 향해 “NRA 회원에 대한 할인 혜택을 다시 시행하지 않으면 세제 혜택은 없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케이글 부시장은 “기업들은 보수 진영과 공격을 해놓고 우리가 맞서 싸우지 않을 것이라 여겨서는 안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NRA를 보이콧 하기보다 정신 건강 치료 및 학교 안전 규제 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총기 소유자에 대한 차별은 적절치 않다”고 역설했다.
페덱스는 NRA를 향한 보이콧이 퍼지는 가운데서도 NRA와 제휴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26일 페덱스는 “총기 소유권에 대한 미국 시민의 헌법적 권리를 강하게 지지한다”며 NRA 회원들에 대한 할인 제도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