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아니요’로 답하십시오.
성폭력 사건을 선정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 거리로 다뤘습니까? 희롱·폭력이 있었지만 아마 연애 관계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까? 야한 소설을 쓰듯 피해 내용을 상상하고 묘사했습니까? 성폭력은 ‘나 같은 보통 사람’의 일상과 별 상관없는 일입니까? 딸 가진 부모가 특별히 조심해야 하는 범죄입니까? 성폭력을 예방하려면 여성 스스로도 조금은 주의해야 합니까?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안타깝지만 어찌됐든 더럽혀졌습니까? 신문지면 한 귀퉁이에 웅크려 앉아 검게 울고 있는 모습입니까? 피해자는 ‘멍든 꽃’이고 가해자는 ‘악마’라고 쓰면 시적인 제목이 될까요? 때마다 앞세우는 ‘컨트롤타워’ 대책은 어떻습니까? 내부고발자가 계속 회사를 다니게 할 수 있답니까? 고발자가 신분을 감추면 무고한 사람이 마녀사냥 당할 우려가 있다고 봅니까? 성관계는 있었지만 합의가 됐다는 가해자의 말도 ‘공평하게’ 보도해야 합니까? 8년 만의 고백이 뒤늦은 복수심이나 출세,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라고 한 번이라도 의심했습니까? 그 옛날엔 당연한 문화였는데 고소도 못할 일들을 이제와 들추는 게 비겁해보입니까? 대선주자 정도의 거물이라면, 정권의 성패가 달려 있다면, 성폭력 범죄도 공작(工作)의 시각에서 바라봐야 하는 게 언론입니까? 성폭력 가해자의 아내와 딸 근황을 추적하는 게 기자입니까?
숨 막히게 질문해서 미안합니다. 저 역시 묻고 쓰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데 여태껏 한 번도 말과 글로 뱉어본 적 없는 것 같아 몸이 아팠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딱히 새로운 질문도 아닌데 그렇습니다. 어디서 한번쯤 들어봤을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에 다 있는 겁니다. 갑자기 튀어나와 누구 발목을 날린 지뢰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된 물음이고 투쟁입니다. 대답은 마음속으로만 하셔도 됩니다. 대신, ‘예’가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잠시 숨을 참아보세요. 그러다 딱 죽겠다 싶을 때 뻐끔 쉬는 겁니다. 그렇게들 ‘미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컴컴한 술자리에서 ‘여기자는 이래야 한다’는 투로 기자수첩도 어때야 한다는 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파심에 몇 자 덧붙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나의 현장은 지금 몸담은 언론이자, 아직은 여성으로 통용되는 신체였네요. 이상 기자가 현장에서 수첩에 적은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