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의 키워드] 불우 어린이-봄에도 이 꽃봉오리들은 추워요

입력 2018-03-07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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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낮 기온이 영상 15도까지 올랐던 지난 토요일, 동네 천변(川邊) 산책로에는 빨리 걷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나와 봄기운을 즐기고 있었다. 나이 든 사람들은 다시 맞은 봄의 생명력을 확인하고 있었고 젊은 부부들은 아이들에게 봄의 즐거움, 화사함, 다사로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개천에서는 오리들이 봄볕 속에서 새끼들을 거느리고 먹이를 찾고 있었다.

연분홍빛 파카를 입은 대여섯 살짜리 딸에게 “우리 조금만 더 걷다가 저기 백화점 가서 맛있는 거 사먹자”고 다정하게 말하는 행복한 가장이 있었다. 그들 앞에는 여동생을 킥보드에 태우고는 내리막길을 쏜살처럼 밀고 가는 초등학생 저학년 오빠가 있었다. 아이들 아빠가 대견한 표정 반, 걱정스런 표정 반으로 아이들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또 그 뒤엔 봄볕에 달아올라 뺨이 발그스레한 그의 아내가 아이들 겉옷을 든 채 아들더러 “조심해!”라고 소리치며 따라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몸짓에서, 까르륵 웃음소리에서, 엄마 아빠를 부르는 소리에서, 칭얼대는 소리에서 봄을 느끼고 생명을 느끼며, 아직은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동네에 살고 있음에 고마움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TV를 켰다. 보통 땐 잘 안 보던 영상을 왠지 이날은 끝까지 보게 됐다. 상고머리를 한 사내아이가 “다 추워요. 다 얼었어요. 한번 가보세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어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 한 분이 나오고, 남루하고 추워 보이는 방이 보였다. 내레이터가 말한다. “올해 아홉 살인 영호는 병든 할머니와 온기 없는 단칸방에서 단 둘이 살고 있습니다.….”

불우어린이를 도와달라는 공익광고다. 계속된 내레이션 내용은 이랬다. “아빠 없이 영호와 영희, 남매를 키우던 영호 엄마도 집을 나갔다. 어린 것 둘을 맡은 할머니는 몸이 약하고 경제적인 능력도 안 돼서 영희를 갓난아기 때 영아원에 맡겼다. 영호네 방은 몹시도 추웠던 지난겨울에도 난방이 안 됐다.”

영호의 목소리가 다시 나온다. “영희가 안됐어요. 내가 없었더라면 영희가 할머니랑 살았을 텐데…. 영희를 생각하면 가슴에 독침을 1초에 9번쯤 찌르는 느낌이에요. … ….” 영호의 목소리 사이로 할머니가 눈물을 훔쳤다. 다시 내레이션. “월 3만 원이면 영호 같은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 ….”

영호의 고달픈 삶을 소개한 공익광고 바로 뒤에는 어린이 유산균 광고가 나왔다. 예쁘고 날씬한 유명 여자 배우가 화려하고 널찍한 거실에서 포동포동 귀여운 아기를 안고 “아이들을 건강하게 잘 키우려면 어릴 때부터 이 유산균을 꼭 먹여야 한다”고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채널을 바꿨더니 여러 방송이 연예인들과 그 가족들이 출연하는 ‘인생맛집’, ‘인생여행’, ‘인생주점’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 요리는 평생 한 번은 먹어봐야 합니다.” “거기는 꼭 가보셔야 합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가보겠어요.” “내가 여태 이 술집에만 오는 이유는 안주가 정말 죽이거든요.” 화려한 화면에 이런 멘트가 이어졌다. 채널을 또 바꿨더니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깨끗한 물을 먹지 못해 1년에 1400명이 죽는다. 1만 원씩 모아서 이들에게 물을 먹이자”는 내용의 공익광고가 비쳤다.

영국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1795~1881)은 역저(力著) ‘의상철학(Sartor Resartus)’에서 어린이를 봄의 꽃봉오리에 비유했다. “도처에 이슬을 담뿍 먹은 향기가 풍겨 나왔고, 희망의 봉오리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 봉오리는 어린 시절 서리를 맞으면 비록 꽃은 필지라도, 성년에 이르러 열매를 맺지 못하며, 씨라고는 찾을 수 없는 가시 돋치고 쓰디쓴 돌덩어리 열매만을 산출하게 된다.”

‘서리를 맞는 아이가 너무 많구나 …’, 잠깐 걱정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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