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은 는개를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라고 풀이했다. 솔직히 맘에 들지 않는다. ‘늘어진 안개’의 줄임말임을 설명했으면 좋으련만…. 순우리말 는개는 빗줄기가 몹시 가늘어서 안개가 늘어진 것처럼 부옇게 내리는 비다. ‘비’ 돌림에서 벗어난 재미있는 비가 또 하나 있다. 메마른 땅에 겨우 먼지가 나지 않을 정도로 조금 내리는 ‘먼지잼’이다. ‘잼’은 ‘재움’의 줄임말로 보인다. 는개와 먼지잼, 옛사람들의 말 만드는 솜씨에 감탄할 뿐이다.
초봄에 내리는 비는 낭만적이긴 하나 조심해야 한다. 우리 몸은 낮엔 따뜻하지만 밤이 되면 추운 환절기엔 면역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잠깐 비가 지나가더니 사람도 나무도 바람도 쿨럭거린다. “약을 먹으면 7일, 참으면 1주일이나 간다”는 감기가 아닌가.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서 마셔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빼도, 끓인 청주에 달걀과 꿀을 넣은 달걀술(일본의 민간요법)을 마셔도 1주일가량 지나야 낫는 질환이니 걸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감기(感氣)는 한자이긴 하나, 중국에선 쓰지 않는 말이다. 중국 사람들은 감기를 ‘감모(感冒)’라 말하고 쓴다. 일본에서 온 한자도 아니다. 일본인들은 감기를 ‘풍사(風邪)’라고 한다. 조항범 충북대 교수는 “감기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어일 가능성이 크다”며 “일찌기 ‘감모’가 우리말에 들어왔으나, 지금은 ‘감기’에 밀려 잘 쓰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순우리말 ‘고뿔’도 감기에 밀려 요즘엔 듣기가 어렵다. 그래서 “고뿔은 밥상머리에서 물러간다”, “정승 될 아이는 고뿔도 안 걸린다”, “남의 죽음이 내 고뿔만도 못하다” , “고뿔도 제가끔 앓으랬다” 등의 속담이나 문학작품 속에서 고뿔을 만나면 반갑기까지 하다.
고뿔의 어원은 ‘곳블’이다. ‘고ㅎ(코)+ ㅅ + 블(불)’의 형태다. ‘코에서 나는 불’로 해석되는데, 감기에 한 번이라도 걸려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감기의 대표적인 증상은 콧물과 코막힘. 줄줄 흐르는 콧물을 계속 닦거나 막힌 코를 뚫기 위해 킁킁거리면 코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열이 난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이 재미있는 단어 고뿔은 16세기 문헌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니 그 이전부터 쓰인, 역사가 아주 깊은 말임이 분명하다. ‘곳블’은 원순모음화로 ‘곳불’이 되었다가, 2음절 초성이 앞 음절의 ‘ㅅ’ 때문에 된소리로 바뀌어 지금의 고뿔이 되었다.
“이 밤 이곳엔 ‘젖지 않는 비’ 안개가 내리고 있다.” 어젯밤 지방에 사는 친구가 보낸 한 줄 시 같은 문자메시지다. 오늘 아침 서울엔 가랑비가 내린다. 충청도의 안개가 서울로 오는 동안 는개가 되고 이슬비가 되고 가랑비가 되었나 보다. 찬 기운이 감도는 봄날, 모쪼록 고뿔에 걸리는 이가 없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