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잘 아시겠지만, 하루키는 서른일곱 살 때인 1986년에 낸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같은 것들을 소확행이라고 했지요. 그러고 보면 소확행이라고 할 만한 게 우리 주변에는 참 많습니다. 블로그를 찾아보니 ‘비 그친 새벽, 창문을 열고 새들 지저귐을 듣는 것’, ‘원두를 손으로 갈며 진한 커피 향을 맡는 것’,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글렌 굴드의 연주로 듣는 것’ 등을 하루키 스타일 소확행 리스트에 올린 사람도 있더군요.
하루키식 소확행은 우리나라에 쉽게 정착했습니다. 취업과 결혼의 어려움, 결혼 후 아이 키우기의 어려움, 내 집 마련의 어려움 따위에 숨이 막힌 여러분들의 소구(訴求)와 자본의 마케팅이 결합한 결과라는 분석이 그럴듯합니다. 특히 올해는 서울대학교의 무슨 연구소가 소확행을 올해의 소비 트렌드로 꼽으면서 이 말이 등장하는 빈도도 높아졌습니다. 언론도 이 말을 키워드로 하는 식품, 화장품, 옷 등의 상품과 영화와 책을 늦을세라 매일 소개, 정착을 도왔습니다. 이 글을 쓰던 날 아침에도 “무엇이 되겠다는 꿈 대신 현실의 만족을 추구하는 데 충실한 여주인공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이른바 소확행을 추구하는 요즘 청춘을 대변한다”고 쓴 영화 소개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소확행은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도나도 큰 것만 추구해서는 안 될 일이요, 큰 것만 좇다가 실패하면 완전히 주저앉아 재도전 의욕마저 상실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또 모두가 큰 것만 찾아다니면, 세상에서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작은 것 찾기, 작은 것 만들기는 소홀해질 거라는 걱정도 됩니다.
더 생생하고 확실한 예를 들지 못해 미안하지만, 남이 베풀어 준 것이 아무리 작아도 확실하게 미안하다고 하는 게 소확감, 소확미라는 걸 말하려고 얼마 전 들은 이야기를 옮겼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 너무 많아 일일이 예를 들면 끝도 한도 없습니다.
시사용어사전은 소확행을 스웨덴의 ‘라곰(lagom)’, 프랑스의 ‘오캄(au calme)’, 덴마크의 ‘휘게(hygge)’라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알려줍니다. 하루키의 나라, 일본도 그렇지만 이들 세 나라 모두 타인에 대한 배려, 즉 감사와 미안함의 표시가 일상화된 나라들입니다. 이들 나라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지역 사회, 환경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거지요. 이런 것들은 소확행을 추구할 수 있는 토양이 있는 나라일수록 소확행의 성취가 쉽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소확감, 소확미가 바탕이 되어야 소확행이 더 확실해진다는 증거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