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려한 자연경관을 지닌 우리의 보물섬 제주. 워낙 관광지라는 인식으로 직결되다 보니 농경지라는 연상은 쉽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는 세계에서 인정한 고유의 농업 시스템을 이어온 섬이기도 하다.
지난달 29일 제주를 찾았다. 공항에서 나오니 온화한 봄 공기가 손님들을 맞이했다. 내륙보다 한참 이른 벚꽃이 마을마다 한창이다.
만개한 봄꽃과 함께 외지인의 눈을 사로잡은 건 수많은 돌무더기 길이다. 짙은 회색의 돌들을 쌓은 나지막한 담이 옹기종기 모인 밭의 테두리를 에워싸 구획을 나누고 있다. 김포평야 같은 시원한 맛은 없지만 밭마다 하나하나 분리돼 각자의 사연을 지닌 듯하다.
해안가에서부터 중산간까지 제주섬을 띠처럼 두른 밭담의 모습이다. 제주에서는 바람 때문에 밭을 규모화하기가 어려워, 넓이를 키우기보다는 여러 개를 조성하고 경계를 밭담으로 두르게 됐다는 게 현지인의 설명이다.
화산섬인 제주의 농경지는 대부분 척박한 현무암 돌밭으로 개간을 해야 농사가 가능했다. 이에 예로부터 섬사람들은 경작을 위해 돌을 캐내 밭 주변에 쌓으면서 자연스레 밭담이 됐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형성된 밭담은 제주 전역에 걸쳐 2만2000㎞가 넘는다고 한다. 하늘에서 보면 검은빛을 띤 돌담길이 구불구불 끊임없이 이어져 제주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제주의 강한 바람은 토양의 수분 증발을 활발하게 해 씨앗 발아를 어렵게 하며, 작물을 쓰러트린다. 여름의 집중호우는 토양 유실의 원인이다. 이를 막는 밭담은 기공이 많은 현무암을 틈새가 많게 쌓아 제주의 강한 바람에도 잘 견뎌낸다. 바람구멍으로 스며든 따뜻한 바람은 농작물의 생육에 도움을 준다.
토양 유실을 막고, 농경지의 작은 돌들을 따뜻하게 해 수분을 보존하는 효과도 있다. 화산섬으로 돌이 많은 척박한 지형적 특성을, 그대로 활용해 독특한 농업 환경으로 승화시킨 선인들의 지혜가 감탄을 자아낸다.
바람을 막고 수분을 유지해 주는 밭담의 높이는 재배 작물 선택의 주요 고려사항이다. 상대적으로 밭담이 낮은 경작지에는 감자, 당근과 같은 키 작은 작물을 심는다. 비교적 밭담이 높은 밭에는 조, 보리 등이 재배된다.
열악한 제주 농업을 지켜온 버팀목인 밭담은 농업적 가치 이외에도 제주의 미학을 대표하는 빼어난 문화경관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산간지대의 난개발을 막는 장치로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는 역할도 한다. 이 같은 가치를 인정받아 밭담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2014년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지정됐다.
돌아가는 길. 자연에서 답을 찾은 밭담을 뒤로 한 채, 미세먼지가 난무하는 내륙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