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14일(현지시간)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미명(未明)을 미사일로 가를 때도 도덕성을 우위에 뒀다. 시리아 정부군의 반인도주의적인 화학무기 사용을 응징하겠다는 것이 폭격의 근거였다. 화학무기에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이는 어린이의 사진을 외신에서 본 이들이라면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폭격에 ‘아 그럴 만한 일이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의 명분이란 늘 이중 잣대다. ‘도덕성 갖춘 전쟁’이란 단어가 모순이듯, 그 속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
서구의 시리아 폭격 역시 중동에서 이들이 펼치는 전략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 예멘 내전에 개입했다. 이후 1만여 명이 사망했고, 셀 수 없이 많은 수가 난민이 됐다. 사우디가 예멘을 침략한 것은 반군의 배후를 이란으로 봤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런 사우디에 이달 초 1조4000억 원 상당의 무기를 판매했다. 사우디의 예멘 폭격은 지지했고, 그 반대는 성을 내며 비판했다.
전쟁 그 자체의 참상에 주목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의 이번 시리아 폭격 역시 러시아를 필두로 이란, 시리아, 하마스, 헤즈볼라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 진짜 목적이란 분석이 적지 않다.
시야를 우리에게 돌려도 이중 잣대는 마찬가지다. 중동 언론은 미국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지만, 우리가 언제 서구 언론보다 이들을 신뢰한 적이 있던가.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이 했던 외부로 향한 지적을 내부로 돌린 것이 지나친 일인가. 그를 구하기 위한 청와대 청원은 촛불과 문재인 정부를 괴리시키는 일은 아닌가. 성동조선, 금호타이어, 한국지엠 사태에서 노동자를 원인의 근간으로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잣대를 들이댄 일인가.
전쟁은 ‘명분 합리화, 증거 조작의 역사’다. 이런 명제는 십자군 전쟁이든, 지금이든 변하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있었던 성추행이 사라진 기억이 되거나, 불합리가 관행으로 바뀔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