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마니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이 장면은 천재 수학자 존 내시(John Nash, 1928~2015)의 일대기를 그려 2002년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등을 받은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하이라이트이다. 영화에서 20대의 존 내시는 ‘게임이론’을 발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제2의 아인슈타인 등으로 불렸지만 불행하게도 환청이 들리고 허상이 보이는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삶은 하루하루가 고통이었지만, 헌신적인 아내 덕분에 정신분열증을 극복하고 마침내 노벨경제학상을 받게 된다.
사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만년필을 건네는 장면은 만들어진 것이다. 동료 학자들이 그에 대한 존경, 병마를 극복한 것에 대한 축하, 격려 등 백 마디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만년필의 상징성을 끄집어내어 기막히게 연출한 것이다.
만년필의 상징성을 이용한 것이 이 영화뿐일까? 영화가 아닌 실제 역사에 등장했다. 그날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열린 날, 장소는 도쿄만(灣). 미국 전함 미주리호 함상(艦上)이었다. 하늘엔 수백 대의 폭격기와 수천 대의 전투기가 떠 있었는데 이 실제 상황의 총감독은 5성 장군 맥아더 원수(Douglas MacArthur, 1880~1964)였다. 참고로 미국은 이날을 승전 기념일이라고 부른다.
갑판 위에 녹색 테이블보가 깔린 탁자가 등장했고 2개의 항복문서가 그 위에 펼쳐졌다. 수많은 수병(水兵)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대표 두 명이 먼저 서명했다. 다음 차례는 맥아더 원수였다. 맥아더는 탁자로 다가가 오른쪽 주머니에서 만년필 한 움큼을 꺼내 놓고 자리에 앉았다. 한 걸음 떨어진 뒤에는 노병(老兵) 둘이 서 있었다. 필리핀 전선의 웨인라이트 중장과 싱가포르 전선의 퍼시벌 중장이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최근 전쟁이 끝나 풀려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눈에 확 띄는 빨간색 만년필을 잡았는데 이것은 분명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작가인 그의 아내에게서 빌리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건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귀재인데 필리핀 원수모, 선글라스, 옥수수파이프는 그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맥아더는 왜 만년필까지 자신의 상징에 넣으려 했을까? 약 4개월 전 독일 항복 조인식에서 서명한 파커51 두 자루로 V자를 만들어 엄청난 카메라 세례를 받았던 자신의 부관 출신 아이젠하워(1890~1969) 장군에게 경쟁의식을 느껴 ‘상징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말없이 한 수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만년필만 보고 사는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그렇게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