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을 살아서 건너온 모든 사람들, 양계장의 닭들, 축사의 소 돼지들, 동물원의 백두산 호랑이와 북극곰들에게 나는 다 같은 중생으로서 동지애를 느낀다. 그리고 노동현장과 쪽방에서 더위를 이기지 못해 돌아가신 분들에게 애도를 보낸다. 아, 저 악몽의 여름. 내 작업실은 오피스텔 맨 꼭대기 층인데 천장이 펄펄 끓어서 방 안은 생선 굽는 오븐처럼 뜨거웠다. 에어컨은 켜 놓으면 골이 띵해지면서 뼈마디가 쑤셨고, 꺼 놓으면 생선구이가 될 판이었다.
열(熱)에 냉(冷)을 들이대면 열이 덧난다고 동의보감에 적혀 있지만 나는 냉면과 냉콩국수를 먹고 애들 먹는 아이스크림도 사먹었는데, 아무 소용없었다. 나는 방 안에서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쪽방촌 골목에 소방차가 물을 뿌렸는데, 언 발에 오줌 누기를 거꾸로 하는 꼴이었다. 나는 이 더위가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듯이 이 죄 많은 인간세(人間世)를 불로 벌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주여 자비를, 자비를!”을 외치면서 헐떡였다. 하느님의 자비는 끝내 없었고, 처서만이 자비였다.
더위가 좀 수그러지고 콧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오니까 눈물이 났다. 더위는 빈부의 양극화와 개인의 고립이 극에 달한 사회의 하층부를 짓밟았다. 2018년 한국의 더위는 1995년 이래 계속되는 시카고의 폭염처럼 불평등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드러냈고, 인간의 사회가 더위나 추위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제 더위는 개인의 것이 아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둔 지 오래되어서 아침에 지하철을 탈 일이 없지만, 만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수많은 청장년들을 생각하면서 2018년 여름을 스스로 달랬다. 사람들은 UN 성냥통 속의 성냥개비처럼 촘촘히 박혀서 육신은 찌그러지고, 너의 땀과 나의 땀이 비벼진다. 여름옷 입은 남녀의 맨살이 서로 닿고 몸 냄새가 뒤섞인다. 비 오는 날에는 젖은 옷, 젖은 우산, 젖은 가방에서 떨어지는 물이 골고루 비벼진다.
도심지 역에서 전동차가 멎고 스크린도어가 열리면 사람들은 터진 고무풍선에서 바람 빠지듯이 열차 밖으로 튕겨져 나와서 비틀거린다. 아침 8시 30분쯤에 도심지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면 지각하지 않으려는 노동자들이 뛰어서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발자국 소리가 따닥 따다닥 거리를 울리는데, 취업을 못해서 자소서, 이력서, 졸업증명서를 들고 폭염의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은 아침 출근시간에 이 만원 지하철에 탈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밤늦은 시간에 열차 안에서 파김치가 되어 졸고 있는 청년들이, 술 마시고 놀다 돌아가는 나의 늙은 몰골을 보고 자리를 양보하니 민망하고 부끄럽다.
이 지옥 같은 여름 내내 고용, 소득, 출산은 바닥을 쳤다. 나는 본래 오활(迂闊)하고 또 오랫동안 누항(陋巷)에 뒹굴고 있으니 헤아림이 졸렬해서 돈이 백만 원 넘어가면 동그라미가 몇 개인지 세지도 못한다. 이러니 창조경제나 소득주도를 입에 담지 못하지만, 내 이웃의 고통을 말할 수는 있다. 민생을 압박하는 중요한 정책을 만들고 시행할 때는 그 정책이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나 사회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헤아림, 즉 토털 픽처(total picture)를 그려놓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날 벌어 그날 먹고, 한 달 벌어 한 달 먹는 사람들의 삶의 바탕을 휘저어서 헝클어놓고 나서 “참아라 참아라” 하니, 손에서 입으로(from hand to mouth) 바로 건너가는 벌어먹기를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라는 말인데, 참지 못하겠다 해도 안 참을 도리가 없으니 결국 참을 수밖에 없지만 역시 참을 수 없다. 그러니 “참으라”는 말은 어쩌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고, 하나 마나한 말이다.
남을 지도한다는 사람이 이 모든 문제는 전 정권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복장 터진다. 이 사태가 전 정권의 책임이라면 현 정권은 왜 존재하며, 국민이 왜 표를 모아서 현 정권을 세웠겠는가. 인간의 모든 문제는 당대의 책임이고 현 정권의 책임이다. 고려 때 비롯된 원인으로 해서 그 해악이 지금 드러나고 있다고 해도, 이것은 고려 조정의 책임이 아니며 고려의 전 정권인 신라 조정의 책임이 아니고, 현 정권의 책임이다.
내가 사는 일산 신도시 식당 거리에서도 지난여름 많은 자영업자들이 점포를 헐어서 떠났고 새로운 자영업자들이 내부수리를 해서 들어왔다. 순대국밥, 삼겹살 오리구이, 김밥, 양꼬치, 오뎅바, 모듬튀김이 떠났고, 비슷한 가게들이 또 들어왔다. 이들은 강자에게 자신의 살점을 내어주어야만 먹이 피라미드의 밑바닥으로 편입될 수 있다. 먹이의 정글 속에서 홀로 싸우는 마지막 단독자들, 그 세무행정상의 이름은 ‘자영업자’다.
이제, 한국의 젊은이들은 아무데서나 키스를 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남학생 여학생이 담 밑에 앉아 있으면 집 안에서 엄마들이 물을 끼얹었다. 나는 거침없이 키스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신난다.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었다는 확신이 든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민생의 어려움을 살핀다고 사진기자 데리고 재래시장에 가서 떡 사먹고 어묵국물 마시고 생선 주무르고 손가락으로 김치 집어먹고 배춧값 물어보는 꼴을 보면 화나지만, 거리에서 키스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나는 희망을 느낀다. 젊은이들이 연애를 하니까, 우리나라는 살아 있고, 삶은 지속되는 것이다. 2018년 여름의 아침을 만원 지하철에서 시달리다가 저녁 거리에서 키스하는 젊은이들은 나라의 자랑이다. 술집에 모여서 울분을 토하는 젊은이들은 나라의 힘이다. 사랑과 긍정과 분노의 힘이 없다면, 어찌 저 폭염의 고해를 건너갈 수가 있겠는가.
나는 조선(朝鮮)이라는 두 글자가 인류 사상 가장 아름다운 국호라고 생각한다. ‘새롭고 싱싱한 아침’이라는 뜻이다. 수(隋),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은 한 음절 외마디로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지만, 이 국호들은 관념 그 자체여서 실물감이 없고 서양 여러 나라의 국호들은 그 안에 별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북한이 왕조 체제를 부정하고 있지만 인민공화국 앞에 ‘조선’이라는 국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좋아 보인다.
나는 몇 년 전, 동해안 울진에서 글쓰기 작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조선’에 해당하는 아침들을 날마다 맞이했다. 동해안은 섬도 개펄도 없고, 일직선의 수평선뿐이었다. 거기에 떠오르는 아침 해는 이 지상과 인간의 생명 속에 새로운 시간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그것은 천지가 창조된 순간의 아침이었다.
모든 시간은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시간이다. 2018년 여름에 만원 지하철에서 남의 땀에 비벼지면서 출근한 모든 사람들의 아침에도 새로운 시간은 찾아오고 있다. 모든 아침은 새로운 아침이다. 시간의 새로움은 그 위에서 인간이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토대이고 날마다 새롭게 열리는 시간의 경이로움은 이 세계의 신비이다. 인간의 생명은 그 새로움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고해의 복판에서 아름답다. 이 새로움과 아름다움이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난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의 바탕이다. 창간 8주년을 맞아 조간으로 바뀌는 이투데이가 독자들과 함께 ‘조선’의 아침을 향해 나아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