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장관이 지난달 2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대법원 강제노역 배상판결에 대해 “일본의 보복성 조치가 나온다면 거기에 대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며 “상황 악화가 예상되지만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면밀히 준비하고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6일 뒤 반도체 관련 소재 등 3개 품목의 대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공식 발표했다. 일본의 공식 발표 후 외교부는 마땅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청와대 주도의 민관 비상대응체제를 만들어 대응하겠다며 민간기업에 손을 내밀고 있는 모양새다.
외교부는 일본 실무 국장과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한일 외교라인이 사실상 붕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강 장관의 호기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다. 이 와중에 강 장관은 아프리카에 갔다. 김정한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은 11~13일 2박 3일간 일본 출장을 갔지만 일본 측 카운터파트인 가나스기 겐지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조차 만나지 못한 채 귀국했다. 오히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일 급하게 출국해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기업인과 지도층을 만나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수출규제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며 미국의 협조를 구하는 대미 외교도 외교부가 아닌 청와대가 직접 나선 모양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10일 방미해 3박 4일간 미 행정부와 의회, 싱크탱크 등 여론 메이커들을 만나 한일 갈등이 한미일 공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득했다. 사실상 현재 외교부 내에서 김 차장만큼 미국 내 네트워크를 쌓은 인사는 거의 없어 김 차장이 직접 나섰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김 차장은 방미 중 자신이 직접 일본과 협상에 나서겠다는 뜻도 나타냈다. 이 같은 발언은 현 외교부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가만있지 않겠다”는 강 장관의 호언장담은 어디로 갔는지 의문이다.
외교라인 붕괴에 대해 외교부 내에서 불만이 많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4강 외교를 주도해 온 것이 외교부 4강 라인 약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지적이다. 특히 강 장관은 외교부 순혈주의 타파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강조하며 혁신을 주창했지만 오히려 조직 장악 실패로 외교부 내 조직 기강 해이와 복지부동만 불러왔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르면 이달 말 단행될 개각에서 강 장관을 경질하더라도 외교부 실·국장 인사까지 청와대 입김이 닿는 한 후임 인사가 와도 지금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많다. 외교부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국방부를 비롯한 다른 부처에서도 청와대에 대한 볼멘소리가 나온다. 일각에선 공무원들이 장관을 바라보기보다는 청와대와 연줄을 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가 나올까. 그만큼 청와대의 입김이 부처 내에서도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부처 내 공무원들을 만나다 보면 공(功)은 청와대가 차지하고 과(過)는 부처 책임으로 돌린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오죽하면 이런 얘기를 공무원들이 떠벌리고 다닐까. 실제 청와대가 부처에서 발표할 사안을 발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왜 청와대가 발표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청와대 대변인의 답변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강조했던 사안이고 계속 관심을 가진 사안이라서 그렇다”고 해명한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해당 부처에 문의해 달라”고 발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습에 대해 청와대는 강력 부인하지만 ‘공은 취하고 책임은 안 지겠다’는 모습으로 비치는 게 사실이다.
집권 중반기를 맞아 이젠 청와대의 정책 기조를 모르는 고위 공무원은 없을 것이다. 아직 모른다면 청와대의 정책 집행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핵심사안 2~3개만 남기고 부처에 권한과 인사권을 돌려줘야 제2의 일본 수출규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lawsd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