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포니는 5도어 해치백 타입의 국내 최초 고유 모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틀린 말이다. 자동차 산업과 문화가 성숙 단계에 접어들기 이전부터 상투적으로 남발된 수식어일 뿐, 포니는 해치백 모델이 아니다.
엄밀히 따져 1975년 등장한 현대차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는 해치백이 아니다. ‘패스트백’ 모델이다.
◇현대차 포니는 해치백이 아닌 패스트백=해치백(Hatch Back)의 정의부터 따져보면 이해가 쉽다.
해치 도어는 물 위로 떠오른 잠수함 상부에 달린, 선내와 바깥을 연결한 동그란 출입구다. 자동차의 해치 도어 역시 여기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5도어 또는 3도어 해치백 자동차의 경우 트렁크 도어가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간 구조여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해치백 도어와 패스트백의 개념이 갈린다.
해치백 도어는 이름 그대로 ‘문’의 역할을 한다. 사람이 타고 내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지만 차 안팎을 연결한 도어 역할을 지닌다. 때문에 해치백은 트렁크와 뒷유리가 일체형이다.
현대차 포니가 패스트백인 이유는 트렁크와 뒷유리가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포니의 경우 트렁크를 열어도 뒷유리는 그대로 고정된 스타일이다.
패스트백은 전형적인 3박스 타입의 세단을 기준으로 트렁크가 극단적으로 짧은 차를 뜻한다. 차 전체 형상이 해치백에 가까울 만큼 트렁크가 짧은 차들이다.
현대차 포니가 엄연히 4도어 패스트백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포니의 후속으로 등장한 포니2는 해치백이 맞다. 트렁크를 들어 올리면 뒷유리도 함께 올라간다. 동시에 커다란 짐도 쉽게 실을 수 있는 입구가 드러난다.
◇2도어 쿠페에서 시작한 스포티 디자인=상황이 이렇다 보니 트렁크가 극단적으로 짧은 ‘패스트백’은 비주류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자동차 종류가 세단과 해치백, SUV 등으로 나뉠 때도 패스트백이 설 자리는 없었다. 세단의 편안함과 해치백의 실용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친 차로 여겨졌다.
북미에서는 오히려 세단과 해치백의 장점을 버무려놓은 왜건(Wagon)이 더 인기였다.
패스트백은 그럼 어떤 장점이 있었을까.
먼저 패스트백은 공기역학적으로 유리하다. 차 지붕과 뒷 트렁크 끝단이 하나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유선형’을 이룰 수 있다. 나아가 스포티한 스타일 덕에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주로 2도어 타입의 쿠페가 이런 ‘패스트백’ 형태를 지니기도 했다.
반면, 최근에는 5도어 해치백이 패스트백 형태로 나오기도 한다. 예컨대 현대차 i30는 유럽 시장에서 i30 패스트백을 내놓고 있다. 일반 5도어 해치백보다 뒤꽁무니가 길게 빠진 형태다.
기본 모델인 i30보다 한결 실용성이 뛰어나고 앞뒤 무게 배분이 유리해 고성능 모델에도 이런 스타일이 쓰인다.
전형적인 4도어 세단도 패스트백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아우디 모두 스포티한 쿠페형 세단을 개발하면서 ‘패스트백’ 디자인을 도입하고 있다.
시작은 1990년대 말 등장한 벤츠 CLS-클래스다. 4도어 세단이지만 트렁크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스포티한 형상을 빚어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이를 일컬어 ‘4도어 쿠페’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이에 질세라 BMW가 5시리즈와 7시리즈 사이에 6시리즈를 선보이면서 4도어 쿠페를 지향했다.
벤츠와 BMW가 쿠페형 세단으로 재미를 보는 마당에 아우디가 이를 지켜볼 리 없었다. 곧바로 쿠페형 세단과 ‘그랜드 투어러’ 개념을 담은 A7과 A5를 앞세워 경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일찌감치 쿠페형 세단을 점진적으로 도입했다.
최근에는 기아차 3세대 K5가 트렁크를 극단적으로 줄였다. 뒷유리 프레임이 뒤 트렁크의 절반 가까이 점령할 만큼, 패스트백 디자인에 가까워졌다.
이제 패스트백 디자인은 자동차 회사가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주류로 성장한 셈이다.
◇이제 SUV도 패스트백 대세=심지어 네모반듯한 스타일의 SUV조차 쿠페 스타일을 강조하고 나섰다.
일반적으로 1~3열을 지닌 롱보디 타입의 SUV는 1~2열에 승객석을, 3열에 짐 공간을 둔다.
2000년대 들어 쿠페형 SUV를 지향하는 새 모델이 속속 등장하면서 이런 추세가 빠르게 변했다.
2000년대 초, BMW가 자사 최초의 SUV인 X5를 선보인 이후, 윗급 X6는 쿠페형 스타일로 내놨다.
3열 짐 공간을 포기하되 브랜드 철학인 스포티를 강조한 디자인이었다. 이보다 앞서 실험 정신이 투철한 쌍용차 역시 준중형 SUV 시장에 쿠페형 SUV인 ‘엑티언’을 선보이기도 했다.
전형적인 비주류이자 틈새 모델로 등장한 쿠페형 SUV는 이제 하나의 주류로 성장했다. 메르세데스-벤츠도 발 빠르게 BMW가 첫 테이프를 끊은 쿠페형 SUV에 속속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이런 추세가 확산하면서 “자동차 시장에 더는 틈새 모델은 없다”는 주장도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일반적인 3박스 세단과 2박스 타입 해치백이 속속 가지치기 모델로 패스트백 모델을 선보이고 있고, SUV도 여기에 합류 중이다.
자동차 회사들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졌다.
누가 먼저, 얼마만큼 시장의 요구에 맞는 ‘패스트백’을 주요 모델 사이사이에 촘촘하게 꽂아 넣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