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폭스바겐, 다임러 등 쟁쟁한 자동차 회사들이 있다. 이들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는 누구일까. 바로 차를 한 대도 만들어보지 않은 차량 연결 기술 플랫폼 ‘우버’다. 또한, 구글과 애플 등도 직접 자동차 제조에 뛰어들며 자동차 회사들의 경쟁사로 떠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자동차 산업에 속한 회사를 분류해보자. 과연 우버와 구글, 애플은 자동차 산업에 속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산업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인공지능(AI)·빅데이터 등 혁신적인 기술이 등장하면서 산업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빅블러(Big Blur) 현상이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빅블러는 '생산자-소비자, 소기업-대기업, 온오프라인, 제품 서비스간 경계융화를 중심으로 산업ㆍ업종간 경계가 급속하게 사라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2013년 ‘당신이 알던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조용호 저)’에서 최초로 제시됐다.
과거에는 업종 간 경계가 분명했다. 산업별 구분이 쉬워 ‘동종업계’라는 말이 통용됐다. 그러나 혁신 기술이 등장했다.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시대가 오면서 상품과 서비스가 하나로 묶이거나, 전통적 판매자와 구매자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공유 플랫폼 등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관계가 사라지고, 공급자와 사용자 관계가 새로 부상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공유 플랫폼의 발달로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면 여행 갈 때 호텔을 예약하지 않아도 현지인처럼 아파트에서 생활할 수 있다. ‘배달의민족’, ‘요기요’ 등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 집을 판매하진 않지만 사용할 수 있고, 온라인을 이용해 음식을 주문해 오프라인으로 배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특히 빅블러 시대에는 온라인·오프라인의 경계도 무너지고 있다. 세계 최고의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은 미국 유기농 식품점 홀푸드를 인수하고 ‘아마존 고’라는 무인점포를 운영하면서 온·오프라인의 벽을 무너뜨렸다.
산업군별로 살펴보면, 유통과 금융, 통신 등의 산업에서 이러한 빅블러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유통업계에선 ‘페이(Pay)’ 전쟁이 가득하다. 물건을 파는 자사의 플랫폼에서 결제 시스템 역시 직접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신세계가 제공하는 ‘SSG페이(쓱페이)’ 등이 대표적이다. 패스트푸드점, 영화관 등에서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과 결제를 진행하는 것 역시 빅블러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은행권에선 통신업계와 합종연횡이 한창이다. 하나금융은 SK텔레콤과 생활금융 플랫폼 ‘핀크’를 만들고 AI를 기반으로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SK텔레콤·KT·LG유플러스 등 이통 3사와 협업해 모바일 신용 대출 상품인 ‘우리 비상금 대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보험업계 역시 ICT 기업과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삼성화재는 카카오와 손잡고 디지털 전문 손해보험사 설립을 준비 중이다.
혁신 기술의 등장뿐만 아니라 사업 포트폴리오의 다각화 역시 빅블러 현상을 촉진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업체가 화장품 사업을 시작하고, 휴대전화 제조업체가 콘텐츠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제조 대기업 관계자는 “쇼핑, 금융 등 생활 전반에서 온·오프라인이나 산업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사업의 기회가 다양해졌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경쟁자가 어디서 출몰할지 모르는 무한경쟁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융합의 필요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혁신 기술의 발전으로 빅블러 현상도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이며, 기업 역시 주요 사업의 전문성을 키우는 동시에 다른 사업 기회를 모색해야 생존할 수 있는 때가 됐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