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착취당하다③] '기한 맞춰야 해서…' 일과 건강 맞바꾸는 IT 개발자

입력 2020-07-1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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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노동환경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많은 청년이 고통받고 있다. 일하고 돈을 받지 못하고, 과로로 건강이 나빠지기 일쑤다.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의 부당한 지시에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청년이 착취당하는 현장, 그곳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IT 개발자 박덕호(30·가명) 씨는 서울 구로구에 4평(13.22㎡)이 채 되지 않은 원룸에 입주했다. 비좁은 공간에서 살지만, 넓은 집으로 갈 생각은 없다. 대부분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서다. 아침 9시에 도착해 앱 개발을 하다 보면 저녁 11시에 오기 일쑤다. 씻고 잠만 자는 공간이 더 넓어도 그에겐 큰 가치가 없다. 몇 시간 누워있다 나갈 텐데 넓은 집이 무슨 소용이냐고 덕호 씨는 읊조린다.

'IT 개발자'는 과로의 대명사다. 대부분 프리랜서로 근무하는 이들은 정해진 기한 내에 일을 마쳐야 한다. 하는 수없이 밥 먹듯 밤을 새운다. 경력을 쌓으면 임금이 괜찮은 편이지만 과도한 업무로 건강을 잃기에 십상이다. "모든 프로젝트는 기한 내에 끝내야 하는 빅뱅 방식이었다. 쫓기고 쫓기는 중압감은 상상을 넘어선다. 수행사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개발자들을 쥐어짠다. 수행사의 수익은 개발자들을 쥐어짠 결과물이다. 개발자들은 스트레스에 공황장애, 뇌졸중, 심근경색 등 항상 위험에 놓여있다"(2018년 12월, 청와대 국민게시판 '어느 IT 개발자의 죽음' 중)는 호소가 절절하다.

◇"돈 주는 사람이 갑이라지만 개발자를 이렇게 쥐어짜서야"

애플리케이션과 웹 사이트 개발은 개발자를 쥐어짜네 만들어진다. 여기에는 업계만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한다.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시스템 통합(System Integration·SI) 프로젝트가 늘고 있다. 이 때문에 일을 주는 발주처도 많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금융사들이 핀테크 서비스 확장에 주력하면서 주요 발주처로 떠올랐다. 은행을 예로 들어보자. 은행은 개발 인력이 따로 없어 이를 외주업체에 맡긴다. 외주업체는 프로젝트에 필요한 인력을 모은다. 이 외주업체를 '마더업체'라고 부른다. 금융사와 개발자 사이에서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마더업체'의 유무가 아니라 역할이다. 마더업체는 발주처에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개발이 덜 된 앱의 단위테스를 진행한다. 개발자는 마더업체의 요구에 단위테스트를 진행하고 결과를 알려준다. 개발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하는 건데 이로 인해 개발 일정은 더뎌진다. 마더업체는 오직 숫자만 바라본다. 완성도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실제 구동 여부보다 발주처가 제시한 일정에 맞춰 '여기까지 만들어졌다'라는 내용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자연스레 허위보고도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일정 안에 개발을 마치라고 개발자에게 주문한다.

덕호 씨는 마더업체가 인력을 구하는 방식도 지적했다. 프리랜서 특성상 함께 일하는 사람이 자주 바뀌게 되는데 일정 수준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프로젝트에 투입될 때가 많다고 했다. "개발자를 막 뽑는 마더업체가 많아요. SI는 개발자 단가가 높은 편이라 고급개발자들은 월 600만 원도 받습니다. 그런데 고급개발자라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이 일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해요. 인력이 부족하니까 일단 뽑고 보는 거죠. 이 사람의 실력을 확인도 안 하고 뽑다 보니까 업무가 주니어나 일 좀 하는 개발자한테 몰리게 됩니다."

많게는 1000명이 투입되는 SI 외에 소규모로 일하는 프로젝트에서도 개발자는 혹사당한다. 개발자가 모인 업체는 일감을 따오기 위해 프로젝트 단가를 낮게 부른다. 다른 업체가 700만 원에 웹사이트를 제작해 주겠다고 하면 자신들은 300만 원에 해주겠다는 식이다. 사업 단가가 낮다 보니 5명이 해야 할 일을 2명이 하게 되고 개발자는 일상처럼 야근하게 된다. 일이 쉬워 고급 개발자를 써야 할 필요가 없을 때는 '경험'을 빙자해 신입에 열정페이를 강요한다. 업체 간부는 "개발자들은 휴일 없이 주말에도 일해야 한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일은 많은데 할 수가 없다"…개발자의 하소연

스마트폰으로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개발자들의 일은 많아지고 있다. 개발자들도 일감은 충분하다는데 큰 이견이 없다. 한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쯤, 3~5곳에서 일하자는 연락이 온다고. 급여나 업무 환경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지 않다. 다만, 살인적인 업무 강도와 압박, 스트레스 탓에 일을 오래 하기 힘들다.

8년 차 개발자 한건호(34·가명) 씨는 3년째 일을 쉬고 있다. 3년 전, 평소 있던 지병이 악화하면서 더는 일하기 힘들어졌다. 지금은 건강을 많이 회복했으나 일을 하고 나서 다시 나빠질까 두려운 건호 씨다. "당뇨랑 통풍이 있었는데 건강 관리할 시간이 없었죠. 가족이 있는데 외벌이라 돈은 벌어야 했고, 일이 많아서 병원도 못 갔어요. 나중에는 정말 죽을 거 같아서 아내에게 말하고 일을 그만뒀어요. 지금은 아내가 바깥 일을 하고 제가 애를 키우고 있죠. 가족을 위해서는 다시 일해야 하는데 다시 그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네요."

종종 발생하는 임금체납도 개발자들에겐 고충이다. 발주처가 마더업체를 끼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마더업체가 갑자기 망하게 되면 임금 지급이 늦어진다. 발주처가 제때 프로젝트 비용을 주지 않아 예정보다 늦게 받는 일도 있다. 실제 2018년 IT노조와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실이 진행한 '2018년 IT노동자 실태조사'에서 프리랜서 노동자 64%가 1~3회 임금체납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전체 125명).

◇대기업 입사 또는 창업이 목표…아니면 떠나거나

프리랜서 개발자들은 경력을 잘 쌓아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을 꿈꾼다. 안정적인 데다, 사내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 야근, 시간 외 수당을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삶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하지만 대기업 입사는 쉽지 않은 일. 나이가 많아지면 더 어려워져 다른 방법을 찾는다.

두 번째 방안은 창업이다. 업체를 만들고 개발자들을 모아 일감을 따와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대기업 입사보다 쉬워 보이지만 이마저도 좋은 대안이 되진 못한다. 덕호 씨는 "연차가 쌓일수록 창업하는 사람도 많이 보는데 그만큼 망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런저런 경우를 따지다 보면 프리랜서로 돈을 버는 게 가장 현실적이죠"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적지 않다는 것이 개발자들의 설명이다. 과로로 숨지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더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표준계약서 등 개발자들의 처우를 위한 관련 규정이 생겨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3월 청와대 국민게시판에 올라온 'BC카드 IT 개발자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기주은(33·가명) 씨는 좀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행복해야 할 설 연휴에 극단적 선택을 할 만큼 무리한 일정과 발주처의 갑질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어요. 법을 안 지키는 곳도 많아 이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고요. 배운 게 이것밖에 없고, 이 일이 좋아서 시작했는데 마지못해 떠나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또 있을까요? 정치인들이 이 문제에 관심 좀 가져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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