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부분에 표시만 하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 내용을 옮겨주는 ‘스마트 형광펜’, 전면카메라와 인공지능(AI)만으로 맨 바닥에서도 작동하는 ‘가상 키보드’, 수백 회에 달하는 반도체 공정을 줄여주는 ‘세상에 없던 소재’까지.
전자업계의 사내벤처 실험에 물이 올랐다. 넥스트 노멀(Next normal) 시대, 분초를 다투며 변하는 산업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들의 선택이다. 아이디어 제출, 사업화 과정과 창업 지원은 물론, 실패 시 재입사 보장 조건도 내걸면서 구성원들의 도전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이렇게 설립된 사내벤처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로봇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에 대한 테스트베드(시험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이다. 분사한 기업 중 일부는 외부 투자를 유치하는 등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올랐다.
1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달부터 사내벤처 프로그램 '하이개라지'(HiGarage) 3기를 모집 중이다. 10월 말까지 아이디어를 접수한 후, 공개 투표와 심사를 거쳐 창업 대상을 뽑는다.
하이개라지는 구글·애플과 같은 유명 글로벌 IT 기업이 차고(garage)에서 창업했던 것에 착안해 만들어진 사내벤처 지원책이다. 1ㆍ2기의 경우 반도체 관련 아이디어만 모집했지만, 올해엔 모집 분야를 대폭 넓혔다. 분야 상관없이 창업 가능성이 있는 아이디어는 모두 심사 대상에 포함된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지난해 모집한 2기 6팀 중 △반도체 부자재 및 칩 스택 특화 모듈, △스마트 이온디케이타임 측정장비, △마스크 펠리클 글루 제거 전용 장비 등을 개발하는 세 팀이 현재 창업을 완료했다. 나머지 세 팀도 창업에 도전 중”이라며 “분사 과정에서 적을 옮기는 경우에도 본인이 희망할 경우 5년 내에 재입사 가능한 규정을 두는 등 구성원들의 도전을 장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2012년 말부터 사내벤처 프로그램 ‘C랩(Creative Lab)’을 도입해 1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다. 2018년부터는 외부 스타트업까지 지원 대상에 포함하면서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C랩 인사이드’와 외부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C랩 아웃사이드’ 투 트랙 체제가 됐다.
C랩 인사이드의 경우 출범 이래 올 상반기까지 총 297개 과제에 1194명의 임직원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중 101개 과제는 사내에서 기존 제품 보완 및 추가 개발에 활용했고, 45개는 스타트업으로 독립했다.
IBM, HP, 필립스 등 다양한 해외 글로벌 기업이 사내벤처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는 동안, 국내 기업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창업 준비와 분사 과정에서 모기업 특허ㆍ장비 등을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 기술 유출 우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을 맞아 산업 구조가 급변하며 기업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기존 경직된 체제 하에서 혁신을 일궈내는 데 한계를 느낀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내벤처 육성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는 "외부 변화에 대한 빠른 접근과 비즈니스 모델 전환을 위해 최근 기업 벤처링 활동은 2010년 이후 폭증하고 있고, 국내의 기업 벤처링 활동도 크게 증가했다"고 말했다.
지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분사ㆍ외부 투자유치에 성공한 기업 수도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C랩에서 분사한 '웨어러블 360도 카메라' 제조기업 링크플로우가 대표적이다. 해당 기업은 지난 4월 72억 원 시리즈B 투자를 받으면서 총 외부 유치 금액이 220억 원을 넘어섰다.
하이개러지 프로그램에서 분사한 반도체 설계 자동화(EDA) 스타트업 알세미 역시 6월 10억 원 규모의 외부 투자금을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