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단체의 말도, 대체 에너지 업계나 증권가의 분석도 아니다. 세계 최대 정유사 영국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의 선언이다.
BP는 최근 '연례 에너지 전망' 보고서에서 지난해 전 세계 하루 평균 석유 소비량이 사상 처음 1억 배럴을 돌파한 것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을 것으로 내다봤다. 불과 1년 전 BP는 수요의 정점을 2030년으로 예측했었다.
이처럼 정유사들의 위기의식에는 전 세계에서 도입하고 있는 친환경ㆍ에너지 전환 정책이 있다. 기후변화 등 환경 문제가 부각하면서 오염의 '주범'으로 인식되는 석유 대신 대체재로서 신재생에너지가 떠오르고 있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석유 제품 수요가 많이 감소하면서 이윤이 급감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삼정KPMG가 최근 발간한 '에너지 전환과 천연가스의 시대'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석탄과 석유 수요가 전년 대비 8% 줄어들 전망이다. 이에 비해 천연가스는 4% 감소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글로벌 정유사들은 하나둘씩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 있다.
BP부터 2030년까지 저탄소 에너지 사업 투자를 10배 늘릴 계획이라고 선언했다. 전기차 충전소도 같은 기간 7500개에서 7만 개로 늘릴 예정이다.
최근에는 미국 동부 해상에서 추진하는 해상풍력 프로젝트의 지분 50%를 얻기도 했다.
일본 최대 정유사 에네오스는 하루 평균 11만5000배럴을 생산하는 오사카 정유공장의 문을 영구히 닫기로 했다. 도쿄 동부 가시마 정유소와 서일본 미즈시마 정유소 역시 수소 혹은 전력 생산 공장으로 바꿀 계획이다.
로열더치셸도 필리핀 바탕가스 주에 있는 하루 평균 11만 배럴 규모의 타방가오 정유시설을 전면 폐쇄한다. 미국 최대 정유사 마라톤페트롤리엄도 캘리포니아주 마르티네즈와 뉴멕시코주 갤럽에 있는 정유공장을 한 곳씩 영구 폐쇄하기로 했고, 뉴질랜드의 유일한 정유소인 리파이닝NZ도 폐쇄를 검토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현대오일뱅크, GS칼텍스, 에쓰오일(S-OIL) 등 국내 정유사들은 그나마 '시설 경쟁력'을 중심으로 버티고 있다.
국내 정유사들은 다른 나라의 업체들보다 정유시설의 연식이 비교적 낮고, 엔지니어들의 실력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점 때문에 최근 코로나19에 따른 수요 감소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을 수 있었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국내 정유사들은 다른 나라보다 높은 시설경쟁력으로 수급 문제에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긴 한다"며 "같은 정제이윤에서도 일본, 중국 등 정유사들과 비교하면 수익성 높다"고 설명했다.
낮은 이윤을 버티지 못하고 다른 정유사들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 그만큼 공급이 줄어들면서 어느 정도 수급 조절이 될 수 있다. 그만큼 국내 정유사들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석유 제품의 궁극적인 수요 감소에 대해 국내 정유사들도 수소나 석유화학 등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이 신재생에너지 사업의 하나인 전기차 배터리 사업 투자를 적극적으로 늘리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도 정부가 주도하는 수소 경제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다른 정유사 관계자는 "국내 업체들이 경쟁력을 갖춘 만큼 변화의 속도가 좀 느린 점은 있었다"면서도 "최근에는 분위기가 바뀌어 본격적으로 변화를 꾀하는 모양새"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