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업계획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매일 세계 경제동향과 변수상황을 점검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쁩니다."
A기업 경영기획실에 근무하는 한 직원의 말이다.
최근 글로벌 경기침체가 가속화되면서 국내 기업들이 내년 경영계획을 수립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 가운데 대부분 기업 경영기획실 소속의 임직원들은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각 기업 재무팀 상황도 다르지 않다. 재무 담당 부서는 한 해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 기획재정부 역할을 하고 있지만 내년 경영계획이 명확하게 수립되지 않아 예산 편성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B사 자금담당 부서 관계자는 "각 사업부 별로 예산을 더 편성해달라는 요청이 많다"며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부서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더욱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 유동적 사업계획, 경기회복 시점도 고려해야
최근 삼성ㆍ현대기아차ㆍLGㆍSK 등 대기업들은 내년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하고 복수의 경영계획 시나리오를 마련해 내년 각종 변수에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각 그룹과 계열사의 경영기획실은 말 그대로 '초비상'이다.
SK그룹 계열사 경영기획 담당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이 각 상황에 맞는 시나리오 경영을 강조함에 따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마저 염두에 두고 경영계획을 수립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상황이 이렇다보니 예년처럼 투자 및 채용계획 등 경영계획의 가장 큰 줄기가 되는 사항도 맥을 잡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런 사정은 다른 그룹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현대차 그룹은 연말에 이뤄지던 경영계획을 2개 이상의 경영계획을 작성하고, 시장상황을 검토한 뒤 내년 초에 경영계획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삼성그룹은 지난 4월 그룹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던 전략기획실이 해체된 이후, 각 계열사별 독립경영을 강화하면서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과거에는 전략기획실 주도로 계열사간 투자조정과 인력채용 문제 등이 조정됐지만, 내년처럼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어려운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최근 각 기업의 유동적 경영계획 수립에 대해 회의적이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유동적 경영계획으로는 장기적으로 꾸준히 진행해야 할 시설투자나 R&D(연구개발) 투자가 미흡해질 가능성이 있다"며 "이같은 투자가 감소되면 향후 경기 회복시 오히려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부서에 예산편성 좀 더 부탁합니다”
경영기획 부서에서 경영계획 수립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재무부서의 예산 편성도 어려워지고 있다. B사 자금 담당 직원은 "경영계획이 확정되지 않다보니 내년 예산에서 인건비 마케팅비 홍보비 등 어느 부문의 비용을 조절해야 할지 판단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더욱이 각 사업부분 별로 실적을 올리기 위한 내부경쟁도 치열해지면서 넉넉한 업무추진비 확보를 위해 재무부서와의 밀월(?)도 간혹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복수의 기업 재무 담당자는 "실무부서에서 원활한 업무추진을 위해 예산편성에 신경써달라는 말을 넌지시 건네곤 한다"며 "친분이 있는 회사 동료나 부서 요청이 있을 때면 곤란해 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내년도 사업계획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돼야 이에 따른 예산 편성 작업도 이뤄질 수 있어 현재 경영기획부서와 협의만 계속하는 등 답답한 상황"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