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내년 1월 백악관을 떠나지만 그가 남긴 후유증은 엄청나다.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기치로 외교를 정치화했다. 미-중 무역전쟁을 유발했고 동맹을 무시하고 압박했다. 정치 라이벌을 인신 공격하고 비우호적인 언론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재판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금기시돼 온 인종주의까지 끄집어냈다. 언어는 품격을 잃었다. 급기야 대선 불복을 선언했다. 민주주의 가치인 다수결주의와 소수 존중, 관용, 절제, 자유시장, 권력분립을 모두 부정했다. 비정상의 극치인 ‘트럼피즘’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다. CNN은 “미 대선이 민주주의와 절망적으로 이혼하는 드라마가 됐다”고 평했다.
이런 ‘블랙코미디’는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더하면 더했지 못지않다. 무너진 승복문화와 진영논리에 따른 극단적 대결정치, 국론분열은 우리가 한참 선배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 된 지 오래다. 대선 불복문화만 해도 그렇다. 뿌리가 깊다. 심리적인 불복이라는 점에서 미국과는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본질은 같다. 진보와 보수 모두의 얘기다. 진보는 보수, 보수는 진보 후보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심리가 강하다. 진보와 보수의 비율은 각각 35~40% 정도다. 대선 뒤 국민 40%가까이가 반대진영에 견고한 성을 쌓고 흔들 기회를 노린다. 안정적인 국정운영은 애당초 어려운 구조다. 역대 대통령 임기 3년차에 지지율이 40% 이하로 떨어진 건 단임제의 한계 때문만은 아니다. 임기 후 한결같이 불행해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다. 되풀이되는 정치보복도 이런 불복문화에서 싹텄다.
진영논리는 우리 정치의 특허다. 그 결정판은 조국 사태였다. 조국을 지키겠다는 진보 사수대와 조국을 낙마시키겠다는 보수 결사대의 ‘촛불 대 태극기’ 집회는 양분된 우리 사회의 현주소였다. 사실보다는 진영의 논리(인식)로 법치와 민주주의 가치를 왜곡했다. 결국 민심이 조국 낙마 쪽 손을 들면서야 막을 내렸다.
그게 끝이 아니다. 이젠 아예 상식조차 부정당하는 극단적인 비정상 사회로 치닫고 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은 비정상의 극치다. 윤 총장 사퇴를 놓고 사생결단의 싸움이 몇 달간 이어졌다. 여당도 윤 총장 제거에 올인했다. 문 대통령은 침묵으로 묵인했다. 법무차관과 고검장, 검사장을 포함해 검사 99%가 반대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법원이 추 장관의 인사권 전횡을 지적하며 제동을 걸어도 막무가내다. 살아있는 권력을 겨냥한 수사가 결정적 계기였다. ‘살아있는 권력도 수사해야 한다’고 한 건 바로 문 대통령이었다. 이런 비정상에 대해 몇 달간 설명도 사과도 없었다.
부동산 정책 대응도 판박이다. 24번의 부동산 규제는 집값을 잡기는커녕 전국을 투기판으로 만들었다. 세종시는 올해에만 44%가 올랐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를 무시한 결과다. 공급이 적은데 수요가 몰리면 집값은 뛰게 마련이다. 해결책은 공급을 늘리는 것이다. 지난 3년 반 동안 공급을 막았으니 규제책이 먹힐 리 없다. 전셋값 급등에 서민이 신음하는데도 정책 실패가 아니라는 정부와 여당이다.
탈원전 수사도 마찬가지다. 산업부가 감사를 앞두고 불리한 자료 수백 건을 폐기하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은폐 증거를 수사 당국에 넘긴 건 감사원이었다. 검찰이 불법 여부를 살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도 여권은 사과 한마디 없이 큰소리친다. 가덕도 신공항도 그렇다. 용역평가에서 꼴찌를 한 후보지를 선정한 것은 누가 봐도 부산시장 보궐선거용이다. 검증할 게 많은데도 그냥 특별법으로 밀어붙인다.
코로나 위기 속에 우리 사회가 갈 길을 잃었다. 정부 정책은 겉돌고 있다. 여권은 권력투쟁과 기득권 사수에 목숨을 걸었다. 여당은 다수 의석을 앞세워 입법 폭주를 하고 있다. 야당은 있으나마나다. 표를 겨낭한 포퓰리즘이 횡행한다. ‘사실이 진실이 아닌 인식이 진실’인 진영논리가 판을 친다. 합법적 전체주의의 그림자마저 어른거린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어려운 사회다. 트럼피즘은 우리의 자화상이다.lee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