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7일(현지시간)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결국 등장하지 못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등장 여부는 누가 남우주연상 혹은 여우주연상을 받느냐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시상식 주최 측과 참석자 중 일부가 별도로 우크라이나 지지의 뜻을 밝히면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반전 및 러시아 비판 여론 형성의 기회로 삼고자 한 그의 뜻은 충분히 관철시킬 수 있었다.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배우 출신 대통령의 ‘한 수’가 통한 것이다.
26일(현지시간)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숀 펜(63)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아카데미 시상식에 초청해 연설을 듣는 자리를 마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아카데미상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우리 모두와 이야기할 기회를 줘야 한다”며 오스카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에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그는 AMPAS가 젤렌스키 대통령을 초청하지 않으면 오스카상 보이콧 운동을 전개하고 항의의 뜻으로 자신이 받은 트로피를 공개적으로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하겠다고 주장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젤렌스키의 연설을 지지한 숀 펜은 지난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방문하고, 젤렌스키 대통령과도 면담했다.
숀 펜에 앞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진행자 중 한 명인 미국 코미디언 에이미 슈머도 젤렌스키 대통령을 아카데미 시상식에 등장시킬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의 한 토크쇼에서 “나는 사실 젤렌스키 대통령을 위성으로나, 혹은 녹화 영상을 통해 아카데미 시상식에 등장시킬 방법을 찾고 싶다고 아이디어를 냈다”며 “적어도 나는 오스카가 몇 가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대단한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상식 중계사인 ABC는 코미디언이자 배우 출신인 젤렌스키 대통령의 성명을 지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젤렌스키의 시상식 등장 의견이 강해진 건 그가 우크라이나 출신 배우 밀라 쿠니스와 통화한 이후였다. 이는 쿠니스가 남편인 배우 애쉬튼 커쳐와 함께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위해 3500만 달러를 모금한 것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며 젤렌스키의 시상식 등장을 촉구하는 여론이 만들어졌다.
결과적으로는 무산됐지만 전쟁 중인 국가의 원수의 시상식 연설이 논의된 건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그가 코미디언이자 배우 출신인 자신의 경력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가능해졌다. 젤렌스키는 그간 러시아 침공에 맞서면서 그의 경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왔다. 이미지와 스토리텔링을 통해 반전 여론을 이끌어낸 것이다. 특히 이번 전쟁 초반 그가 우크라이나에서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지자 키이우를 배경으로 사진을 올리며 항전의 뜻을 밝히는 등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며 국제 사회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그의 행보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그가 시상식에 등장할 경우 영화·예술계의 행사인 아카데미 시상식이 지나치게 정치화된다는 우려다. 미국의 시트콤 작가 브라이언 이더리지는 2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들은 우려는 그들(우크라이나 지지자)이 쇼(아카데미 시상식)를 지나치게 정치화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며 “젤렌스키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거대한 플랫폼이 된다”고 지적했다. 시상식 진행자 중 한 명인 코미디 배우 완다 사이크는 젤렌스키에게 “지금 바쁘시지 않냐”고 묻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뉴욕타임스는 “젤렌스키는 항상 정치에 대한 예리한 이미지와 스토리텔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그의 최고 보좌관 중 상당수가 영화 산업 베테랑이기 때문에 오스카상은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한 인도적 지원 호소에 적합하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젤렌스키가 아카데미 시상식을 반전 및 러시아 비판 여론 형성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으나 그의 등장은 없었다.
그러나 시상식은 젤렌스키 없이도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지했다. 주최 측은 무대 위 대형 스크린을 통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주세요(WE ASK YOU TO SUPPORT UKRAINE IN ANYWAY YOU ARE ABLE)”는 문구를 띄웠다. 참석자들은 연대의 의미로 30초간 침묵의 시간을 가졌고, 일부 참석자는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금색 리본을 달기도 했다. 지난해 영화 ‘미나리’로 한국 최초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도 이날 왼쪽 어깨에 ‘난민과 함께’라는 문구가 적힌 파란 리본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