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놀이터] 흑사병과 자가면역질환

입력 2022-11-0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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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감소세이던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지난달 하순부터 다시 늘어나 요 며칠은 하루 5만 명 선을 넘어섰다. 지난봄 대유행 때 감염된 사람들이 점차 면역력을 잃어가고 새로운 하위 변이도 등장하면서 7차 유행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정말 지독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지구촌에서 코로나19로 죽은 사람은 659만 명이지만 이건 공식 집계이고, 실제로는 세 배 규모인 2000만 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세계 인구가 79억8000만 명인데, 코로나19가 없었다면 지금쯤 80억 명 돌파를 카운트다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코로나19는 치명률이 엄청난 팬데믹은 아니다. 여기에 백신과 치료제까지 개발되면서 지금은 독감보다 약간 높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고령자는 여전히 치명률이 만만치 않고 비만 같은 대사질환이 있다면 위험성이 높다지만 코로나19 대유행이 인류의 진화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치명률이 50% 내외이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에볼라 같은 전염병이 대유행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나마 바이러스에 좀 더 버티는 유전형을 지닌 사람이 살아남는 ‘자연선택’이 일어날 것이다. 그 결과 전염병이 휩쓸고 간 뒤 이런 유전형인 사람의 비율이 올라가고 자손들도 비슷한 구성을 보일 것이다. 실제 인류의 역사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자연선택이 늘 일어났을 것이지만 이를 증명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최근 학술지 네이처에는 14세기 중반 유럽과 근동을 휩쓴 흑사병이 정말 이 지역 사람들의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밝힌 연구 결과가 실렸다. 당시 흑사병 팬데믹으로 이 지역 인구의 30~5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특히 인구가 밀집된 도시는 피해가 더 컸다.

▲ 14세기 중반 흑사병 팬데믹을 전후해 영국 런던의 세 곳과 덴마크의 다섯 곳에 매장된 인골에서 시료를 채취해 분석한 결과 면역력이 강한 ERAP2 유전자 A형을 지닌 사람의 비율이 올라간 것으로 나타났다. 위 사진은 런던 이스트 스미스필드(East Smithfield)의 흑사병묘지(The Black Death emetery)에 묻힌,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인골을 발굴한 모습이다. (사진출처 네이처)
▲ 14세기 중반 흑사병 팬데믹을 전후해 영국 런던의 세 곳과 덴마크의 다섯 곳에 매장된 인골에서 시료를 채취해 분석한 결과 면역력이 강한 ERAP2 유전자 A형을 지닌 사람의 비율이 올라간 것으로 나타났다. 위 사진은 런던 이스트 스미스필드(East Smithfield)의 흑사병묘지(The Black Death emetery)에 묻힌,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인골을 발굴한 모습이다. (사진출처 네이처)

캐나다 맥마스터대 헨드릭 포이너 교수가 이끄는 다국적 공동연구팀은 흑사병 팬데믹을 전후해 영국 런던의 세 지역과 덴마크의 다섯 지역에 매장된 인골에서 시료를 채취해 게놈을 분석했다. 그 결과 면역 관련 유전자들이 있는 자리 가운데 네 곳에서 팬데믹을 전후해 유전형 비율의 차이가 드러났는데, 특히 ERAP2 유전자에서 두드러졌다.

ERAP2 유전자는 A형과 B형이 있는데, DNA서열에서 단 하나의 염기가 다를 뿐이지만 그 영향이 크다. 즉 A형에서는 온전한 단백질이 만들어지지만, B형에서는 반 토막 난 단백질이 만들어져 기능을 하지 못한다. ERAP2는 침투한 병원체의 단백질을 분해해 면역계가 이를 인식해 작동하게 한다. 다만 부모 양쪽에서 B형을 받아 ERAP2의 기능이 없더라고 비슷한 일을 하는 다른 유전자들이 있어 면역계가 작동한다. 그런데 흑사병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이 돌 때는 면역력이 조금이라도 높은 A형인 사람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흑사병 대유행 이전 런던 시민들의 ERAP2 유전자를 보면 A형이 40%였지만, 1348년과 1349년 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은 35%였고 이때 살아남아 훗날 죽은 사람들은 50%가 약간 넘었다. 덴마크에서는 이보다 차이가 더 커 A형이 흑사병 이전 45%에서 이후 70%로 크게 늘었다. 시료 수가 적어 런던의 결과보다 신뢰도는 떨어지지만 경향은 같다. 흑사병 전후 A형의 비율이 불과 10여 퍼센트(%) 늘어난 게(런던 기준) 뭐 그리 대단한가 싶지만 불과 100년, 즉 서너 세대 만에 이 정도 차이가 나는 건 상당한 자연선택 압력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일 흑사병으로 ERAP2 유전자 A형처럼 면역력이 강한 유전형이 선택된다면 그 뒤 수많은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지금쯤 사람들 대다수가 A형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실제로는 현대인의 44%만이 A형이다. 왜 그럴까.

면역력이 강해지면 외부에서 병원체가 침투할 때는 유리하지만 평소에는 과잉 면역으로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면역계가 자신의 신체 조직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자가면역질환이 여성의 사망 원인 10위 안에 들어간다.

ERAP2 유전자 A형을 지닌 사람들 역시 크론병(만성 염증성 장질환)과 류머티즘성 관절염 등 자가면역질환 위험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팬데믹이 없는 시절에는 A형인 사람이 생존과 번식에 약간 불리하다는 말이다. 그 결과 인류 역사에서 A형과 B형의 상대적인 비율이 오르내리면서 오늘날 서로 비슷하게 존재하게 됐다. 자연선택에서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경우를 균형선택(balancing selection)이라고 부른다.

백신과 치료제로 팬데믹의 충격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고(B형 유리) 면역조절제로 자가면역질환 증상을 꽤 완화할 수 있게 된(A형 유리) 인류는 미래에도 A형과 B형의 균형이 유지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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