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오늘 어디 가면 안 되겠죠?”
“네, 쉬어야 할 것 같아요.”
“OO야. 오늘은 안 될 것 같다. 엄마가 다음 달에 다시 예약할게.”
이내 아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린다. 아들은 오늘 처음 본다. 진주 할머니 이야기를 하는 게 시어머니가 키우시는 것 같았다. 한 달에 한 번 진주에서 올라온 아들과 주말을 보낸다고 하는 걸 보니 그만한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 올라오면 춘천으로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고 아들은 엄마랑만의 여행을 기다렸나 보다. 엄마는 아들을 아픈 채로 시어머니한테 돌려보내는 것이 영 불편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었는데.” 아들이 입을 열었다.
“저기, 한번 가보죠.” 내 성격상 잘 하지 않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약 먹이고 다녀와 보세요.”
아이가 아픈데 여행 가도 되냐는 많은 질문에 나는 주로 안 된다고 하거나 굳이 가도 내가 허락한 것이 아니라는 식의 어물쩍한 태도를 하곤 했다. 행여 갔다 와서 아이가 더 나빠지면 그때 왜 가라고 했었냐고 할까 봐 책임을 굳이 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소극적인 자세를 못마땅해하면서도 늘 그렇게 대답해 왔던 내가 나도 모르게 여행 가시라고, 가셔도 된다고 말했다. 엄마와의 데이트를 기다리기에 한 달은 너무 먼 것 같았다.
의과대학 시절 환자에게 동감(empathy)은 해도 공감( sympathy)은 하지 말라고 배웠다. 동감은 환자의 아픔과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공감은 이해를 넘어 감정까지 공유해 자칫 진단과 치료에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동네 의사로 지내다 보니 어디까지가 동감이고 어디부터가 공감인지 잘 모르겠다. 이번에 나는 동감을 넘어 공감까지 해 버려 객관적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것일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배운 대로 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은 들지 않았다.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