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취득 규모 10조 원어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밸류업 계획과 관련하여 자사주 취득 공시를 올린 기업 중 1조 원대 이상을 찾기 힘들 정도인데 삼성전자는 무려 10조 원어치를 매입한다고 했으니 시장에서 환호를 받을 만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삼성전자 시가총액에서 자사주 10조 원어치 매입은 그리 큰 규모가 아니다. 11월 14일에 삼성전자의 보통주와 우선주 시가총액을 합산하면 333조 원이다. 10조 원을 들여 자사주를 취득하면 3%의 영향밖에는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11월 18일 자기주식 취득 결정 공시를 보면 2025년 2월 7일까지 약 3조 원으로 보통주와 우선주 발행주식 총수의 1%에 해당하는 물량을 취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자사주 취득 효과도 한 열흘 정도밖에 가지는 못했고 주가는 다시 우하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과연 10조 원어치의 주식을 살 정도로 자금 여유가 있을까? 3분기 삼성전자의 별도 재무상태표를 보면 보유한 현금 및 현금성 자산과 단기금융상품의 합은 16조6000억 원이고 갚아야 하는 차입금 잔액은 32조 원이 넘는다. 가진 돈보다 갚을 돈이 훨씬 더 많다. 이 차입금 중 유동성장기부채는 22조 원이 넘는다. 유동성장기부채는 장기차입금 중 만기가 1년 내로 도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삼성전자는 여유자금으로 자사주를 취득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향후 1년간 벌어서 남긴 돈으로 취득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분도 확신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3분기 현금흐름표를 보면 올해 9개월 동안 영업활동을 통해 41조 원을 벌었는데 유형자산과 무형자산 투자에 28조 원을 썼고 배당금을 지급하느라 7조 원 이상을 지출했다. 남긴 돈이 6조 원 정도이다. 분기당 2조 원씩 남긴다는 계산이 나오니 10조 원을 1년 이내에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금융정보 제공업체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2025년 삼성전자의 추정 매출액은 올해 대비 약 7.5%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어서 내년에 돈을 많이 벌 것이라는 기대도 어렵다.
결국 삼성전자는 종속기업으로부터 배당금을 수취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와 종속기업을 합쳐서 만드는 연결재무상태표를 보면 현금 및 현금성 자산과 단기금융상품의 합은 104조 원에 이른다. 갚아야 하는 차입금 잔액은 17조 원에 불과하다. 별도재무상태표보다 차입금 잔액이 작은 이유는 삼성전자가 종속기업인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2조 원을 빌렸기 때문이다. 이는 모회사와 자회사 간 내부거래이므로 상쇄된다. 그래서 연결재무상태표의 차입금 잔액이 작게 표시된다.
국내외 종속기업들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과 단기금융상품이 약 87조 원이 넘을 것으로 보이니 이들 돈을 가져오면 될 것 같다. 삼성전자가 이들 기업의 주식을 갖고 있으니 배당금으로 회수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2023년에 삼성전자는 배당금수익으로 29조 원을 벌어들였다. 2022년의 4조 원에 비하면 매우 크게 증가한 것이다. 올해 3분기까지도 배당금수익이 9조 원을 넘어섰기 때문에 종속기업으로부터의 배당금 수취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10조 원 마련과 차입금 상환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국내외 정치변수, 반도체 시장에서의 점유율 축소 등이다. 주가가 다시 흔들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면 또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텐데 언제까지 종속기업이 쌓아둔 돈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사업을 통해 버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어떻게 해서든 성과를 내야 하고 TSMC의 독주로 굳어져 가는 파운드리 물량을 많이 가져와야만 한다. 몇 년 내에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종속기업의 돈도 마를 수 있다. 삼성전자는 사업적으로 정말 중요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