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6일 “상법 개정안 통과는 대한민국 주식시장이 선진시장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라고 했다. 중도층을 겨냥해 ‘중도 보수’, ‘친기업’ 깃발을 흔드는 거대 야당 대표가 대다수 기업이 반대하는 방향으로 내달리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개정안은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를 야당 단독으로 통과했다.
기업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한국경제인협회 등 경제 8단체 부회장단은 국회를 찾아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기업들은 생존을 담보하기 어렵고, 투자와 일자리가 감소하면 국민경제도 함께 어려워질 수 있다”고 호소했다. 주력·첨단산업이 국제 경쟁력을 잃어가는 마당에 큰 혼란을 초래할 상법 개정안마저 통과될 경우 경영 마비는 시간문제다. 국가적 위기가 초래된다는 경고도 빈말일 수 없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개정을 밀어붙인다. 입법 폭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표는 지난달 신년 기자회견에서 개정이 필요한 이유로 기업 합병과 분할로 주식 투자자들이 피해를 본다는 점을 들었다. 26일 발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소액 주주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시대적 명제다. 정부와 국민의힘도 이견이 없다. 하지만 상법을 건드리는 극약처방을 택해 102만 개에 이르는 모든 기업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국가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는 무책임한 도박이고 무리수다.
이해가 다른 주주 전원의 입맛을 맞추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모든 입맛을 맞추라고 법제화하면 줄소송을 피할 수 없다. 기업 미래를 좌우할 결정적 고빗길마다 누가 소송을 제기할지 몰라 이사회는 의사결정을 주저하고 미루게 된다. 기업 경쟁력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결국엔 생존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해외 투기자본도 큰 걸림돌이다. 단기 차익을 추구하는 행동주의 펀드 등이 날개를 달게 된다. 글로벌 기업도 대처가 쉽지 않겠지만, 경영권 분쟁에 취약한 중소·중견기업의 피해 확산은 불 보듯 뻔하다. 김창범 한경협 상근부회장은 이날 “2023년 기준으로 행동주의 펀드 공격 건수는 우리나라가 주요 23개국 중 미국과 일본 다음으로 많다”고 했다.
이 대표가 진정으로 주주를 중시한다면 부작용 적은 합리적 처방을 얼마든지 고를 수 있다. 2400여 개 코스피·코스닥 상장사만 규제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의 유효성은 이 대표 자신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지난해 11월 한국거래소를 찾은 자리에서 “합리적으로 핀셋 규제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이 시행되면 굳이 상법 개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왜 11월의 말과 2월의 말이 이토록 다른지 모를 일이다.
우리 기업들은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불확실성의 먹구름 속에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벼랑으로 밀어서는 안 된다. 투기자본의 경영권 간섭을 위한 멍석을 깔겠다고 안달하는 정치 권력에 과연 누가 공감할지 성찰해야 한다. 친기업 간판을 내걸려면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공약을 늘어놓기에 앞서 기업들의 애타는 목소리를 듣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도 명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