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면을 끝낸 미국 정보ㆍ기술(IT) 업계 거인들이 왕성한 식욕을 드러내고 있다.
미 컴퓨터 장비업체 휴렛팩커드(HP)는 28일(현지시간) 스마트폰 제조업체인 팜을 12억달러(약 1조3380억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앞서 애플 역시 반도체 설계업체인 인트린시티를 손에 넣기로 했고 지난 16일에는 소프트웨어 업체 오라클이 임상시험 관리 지원 소프트웨어 제조업체인 페이즈포워드를 인수키로 했다.
이들 IT 거인의 공통점은 새로 도전하는 사업부문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몸집을 키우며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이다.
이로써 HP는 팜이 보유하고 있는 휴대전화 단말기와 소프트웨어, 절전 기술 등에 관한 특허권을 손에 넣게 됐다.
업계에서는 HP의 팜 인수에 대해 소형 저가 노트북 컴퓨터인 넷북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OS(운영체제)를 포함한 주도권 싸움이 치열한 가운데 이번 합병이 업계에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는 평가다.
팜은 1990년대에 PDA(휴대정보단말기)로 붐을 일으켰지만 스마트폰에 밀려 11개 분기 연속 적자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만 메이커 등도 눈독을 들였지만 최종 HP에 낙찰됐다.
이날 뉴욕증시에서 팜의 주가는 전날보다 0.43% 하락한 4.63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8일 소식통을 인용해 애플이 최근 미국 반도체 설계업체 인트린시티를 인수키로 했다고 전했다.
소식통은 인수 조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반도체 전문지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톰 하필 수석 편집자는 인수가가 1억2100만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는 애플이 2008년에 인수한 저소비 전력 칩 메이커인 P.A. 세미에 지불한 2억7800만달러의 절반 수준이다.
애플은 P.A.세미 인수를 계기로 프로세서 설계팀을 설치해 독자적인 칩 개발로 제품의 차별화를 도모해 오고 있다. 이번 인트린시티 인수는 이 프로젝트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인트린시티는 휴대전화용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 칩을 개발하고 있는 비상장사다. 일부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인트린시티의 기술은 아이패드에 탑재되는 마이크로 프로세서(연산처리장치) ‘A4’에 채용되고 있다.
인트린시티는 대다수 스마트폰이 채택하고 있는 영국 반도체 대기업 ARM의 마이크로 프로세서 성능을 향상시키는 기술을 라이센스 공여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작년 7월에는 A4의 핵심 엔진인 ‘허밍 버드’라 불리는 기술을 삼성전자에 공여하기로 한 바 있다.
허밍버드는 ARM가 만든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처리속도를 A4와 같은 1GHz로 향상시키는 기술이다.
오라클은 지난 16일 6억8500만달러(주당 17달러)에 페이즈포워드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15일 종가에 30%의 프리미엄을 얹은 가격이다.
이로써 오라클은 제약회사와 헬스케어 관련 기업에서 사용하는 전문 소프트웨어를 손에 넣게 됐다.
시장조사업체인 포레스터 리서치에 따르면 제약ㆍ헬스케어 업계는 올해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관련 서비스에 260억달러를 쏟아부을 전망이다. 여기에 미 행정부가 헬스케어 업계의 기술부문 개선에 수십억달러의 예산을 편성해 업계의 호기를 예고하고 있다.
오라클은 지난 2008년 헬스케어 업계를 겨냥해 관련 소프트웨어 사업을 본격화했다. 사실 오라클은 이보다 훨씬 전인 2003년 피플소프트를 인수하면서 의료용 소프트웨어 업체 서너에 눈독을 들이면서 헬스케어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당시 오라클은 서너 인수를 통해 헬스케어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했지만 특정 업계에 주력하는 것은 리스크가 따른다는 이유로 무산됐었다.
이후 오라클은 소매 및 금융서비스 등 특정 업계를 겨냥한 전문 소프트웨어 업체 20곳 이상을 인수했다. 이 중 헬스케어 관련 기업은 작년 3월에 인수한 렐시스 인터내셔널 한 곳 뿐이다.
헬스케어 업계에 주목하고 있는 하이랜드 캐피털 파트너스의 비잔 살레히자데 투자가는 “헬스케어 업계 전문이 아니면 업계에 참여해 주도권을 잡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헬스케어 업계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는 만큼 마이크로소프트(MS)나 델 등 다른 IT 대기업도 의료용 소프트웨어 업체 인수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