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자의 힘도 10년을 못간다는 권불십년(權不十年),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란 말처럼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제품도 단종을 맞기 마련이다.
문화가 제품의 생산을 불러오는 지, 제품이 문화를 낳는 지의 연결고리가 확실치 않지만 제품을 통해 삶을 소비하는 방식이 바뀌곤 한다. 60~70년대의 브라운관 TV가 온 동네의 이웃을 불러 모았다면 지금은 지하철에서 제각각 손 안의 TV에 눈길을 두고 있는 시대다.
워크맨은 출시 당시 걸어가면서 음악을 듣는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이 제품은 음악 듣는 것을 즐긴 소니의 공동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의 “비행기에서도 남을 방해하지 않고 음악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지금도 서랍을 열면 소니의 워크맨 한두개는 있을 정도로 국내에서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지금의 MP3 만큼 당시에는 머스트 해브(Must Have) 아이템이었다. 라이프 스타일에도 변화가 왔다. 음악을 휴대케 한 워크맨은 교실 내 불화(?)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두꺼운 사전과 워크맨 만으로 영어를 통달했다는 성공적인 독학생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부카 마사루의 독창적인 생각은 워크맨의 출시로 끝나지 않았다. 휴대용 전자기기 성장의 단초를 제공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5일(현지시간) “(역설적이게도) 워크맨은 소니가 휴대용 플레이어 시장의 주도권을 애플의 아이팟에 넘겨주게 된 상징이다”고 평가했다. 워크맨이 기존 기술에 집착해 디지털 기술로의 전환 시점을 놓친 소니의 실패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LG전자는 “브라운관 TV 판매 비중이 올해 3%에도 미치지 못해 생산을 접기로 결정했다”며 “오는 2012년 말이면 국내에서 아날로그 방식의 TV 전파 송신이 중단되는 점도 감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TV 생산업체들의 브라운관 TV 생산 비율은 90%에 달했다. 하지만 디지털로의 시대전환에 부응하지 못한 제품은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가로 세로로 널찍한 브라운관TV에 이웃들이 둘러 앉아 김일 선수의 레슬링을 시청하던 시기는 이미 옛날 일이다.
반면 단종 시점을 한참 지난 제품이지만 여전히 두꺼운 팬 층을 보유하고 있는 제품도 있다. 바로 즉석 촬영 카메라인 SX-70이다. 이 카메라는 폴라로이드(Polaroid)사에 의해 지난 1972년~1985년 생산됐다. 단종된 지 2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각종 영화나 CF의 소품으로 등장하면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이 제품과 관련된 가방 등의 악세사리들이 여전히 인기품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 중고장터를 통해 4년 전 SX-70을 구입한 허금회(30)씨는 “수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SX-70은 필름마다 독특한 색감을 지니고 있다”며 즉석 촬영 카메라를 이용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고비는 있었다. 지난 2008년 이 제품에서 사용할 수 있는 폴라로이드 필름 생산이 모두 단종됐다. 필름 등 아날로그 제품을 주로 생산한 회사인 폴라로이드사가 경영난으로 2008년 6월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같은 해 12월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한 장에 4000~5000원에 이르는 다른 카메라 전용 필름을 지속적으로 구입했다. 결국 올해 초 폴라로이드사 모든 직원들은 필름을 다시 생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애플, 삼성전자 등에서 내놓는 최신 스마트폰에는 음악, TV, 카메라 기능이 모두 합쳐져 있다. 하지만 이들 기능은 수많은 기능 중 하나일 뿐이다.
인터넷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무수한 옵션을 즐길 수 있는 스마트폰은 그 만큼 단 하나의 의미나 기능을 부각하기 쉽지 않다. 디지털시대에도 아날로그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