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계에 재무통 최고경영진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탈조선을 선언한 조선업계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엔지니어 CEO보다는 다양한 사업을 조율할 수 있는 균형감을 갖춘 기획·재무 부문 CEO를 앞세워 내실경영 강화를 위한 채비에 분주한 모습이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넘치는 일감으로 지난 2000년대 조선업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엔지니어 출신 CEO들이 일선에서 퇴진하는 대신 다양한 사업을 조율할 수 있는 균형감을 갖춘 재무통 CEO들이 입지를 강화하며, 공경 경영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업계 최고 재무통으로 평가받는 이재성 현대중공업 사장의 입지는 더욱더 확고해 질 전망이다. 전형적인 엔지니어 출신으로 ‘테크노 경영인’이라 불리던 민계식 현대중공업 회장이 오는 3월 지난 10년간 맡아온 대표이사(CEO)직에서 물러나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은 “민 회장은 등기이사에서 빠지지만, 회장 직함은 유지할 것”이라면서 “앞으로 미래지향적인 큰 그림을 그리는데 주력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경영일선에서의 퇴진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현대중공업은 이 사장 단독 대표 체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사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전형적인 재무통이다. 1975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후 밑바닥부터 경험을 쌓은 이 사장은 1997년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인 현대선물 대표이사 사장 등을 거쳤다.
이후 2004년 1월부터 현대중공업 부사장에 이어 2009년 11월, 현대중공업의 CEO로 승진했다. 당시 현대중공업에서 재무전문가인 그를 선임한 것은 이례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환 헤지와 원자재 수급 대책 등을 세워 회사가 사상 최고 실적 행진을 이어가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업 불황이라는 현재의 위기 극복을 위한 적임자로 기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4년부터 경영지원본부장으로 인사와 노무, 경영혁신·경영기획, 총무·문화, 보안, 원가·회계, 구매·자재, 전산, 안전환경 등을 총괄 담당한 만큼 누구보다 현대중공업을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 연말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홍경진 STX조선해양 부회장도 회계·재무통이다. 홍 부회장은 STX팬오션의 전신인 범양상선 출신으로 강덕수 회장이 인정하는 핵심 브레인으로 알려졌다.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9년 범양상선에 입사해 기획실장과 관리본부장, 제1영업본부장을 거쳤고 이후 STX에너지, ㈜STX의 사장을 역임했다.
STX그룹은 조선사 중 가장 먼저 내년 내실경영에 대비한 경영진 교체와 함께 그룹 경영기조 변화에 불을 당겼다. 지난 2009년 12월, 엔지니어 출신인 김강수 대표 후임으로 당시 최고재무책임자(CFO)인 홍 부회장을 신임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했다.
대우조선해양은 재무 전문가인 남상태 사장을 중심으로 최근 공격적인 수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남 사장은 연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재무회계 임원 등을 역임하고 지난 2006년 초부터 대우조선해양 수장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한진중공업도 재무통인 이재용 조선부문 대표이사 사장 체제를 2년간 유지하고 있다. 2009년 3월 부임한 이 사장은 건국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진중공업 회계담당 이사, 사업관리담당 상무 등을 역임한 역임한 재무통이다.
삼성중공업도 지난 2009년 12월 그룹 인사에서 엔지니어 출신 김징완 부회장이 대표이사 직에서 물러난 후 지난해에는 상담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노인식 사장 단독 대표이사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노 사장은 기획통이지만 엔지니어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선업계의 탈조선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노 사장은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하고 지는 1977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CEO에 올랐다. 입사 후 삼성전자 인사부장, 삼성회장비서실 인사팀 이사, 구조조정본부 인력팀장, 삼성전략기획실 인사지원팀장을 지낸 인사를 겸한 이다.
이후 2007년 에스원 대표이사를 거쳐 지난해 1월 삼성중공업 대표 자리에 노 사장은 지난해 1월 온실가스 배출을 30% 이상 줄인 친환경 선박을 주력 제품으로 개발하겠다는 녹색전략을 선포했다. 녹색전략은 노 사장이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영화두를 내실다지기에 초점을 맞추고 대대적인 조직재정비에 돌입했던 조선사들은 보다 새로운 마인드를 갖춘 새 인물이 등장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절실했다”며 “올해로 만 2년차를 맞는 재무전문가 CEO들이 그동안의 내실 경영을 바탕으로 최근 공격 경영에도 앞장서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