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짓는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필자가 체험한 만고의 진리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것과 ‘심지 않으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농촌에서 땀 흘려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애당초 없었다. 농부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일확천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투자를 통해 이익을 낸다는 개념도 물론 없었다.
필자의 아버지는 특히 남에게 빚지는 일을 끔찍하게 싫어하셨기 때문에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둔 것만큼만 먹고 쓰고 사셨다. 때문에 비록 가난했지만 빚 독촉에 시달리는 일도 없었다.
마이크 샐던이 제시한 화두 ‘정의’가 얼마 전 우리 사회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필자는 그 이유를 ‘성공담론’에 대한 반작용에서 찾고 싶다. 우리 사회는 너무도 오랫동안 ‘사업과 투자를 통한 수익의 극대화’라는 목표에 매달려 있었다. ‘분수에 맞게 성실하게 사는 것’의 가치가 낮게 평가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는 와중에 가계 부채가 급격히 늘어나는 등 ‘부절제의 부작용’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고 있다.
필자는 ‘정의’ 못지않게 ‘절제’가 우리 시대의 화두(話頭)가 되길 바란다. 절제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절제란 무엇인가. 절제는 ‘본질에 가까워지는 것’, 즉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와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다.
가령 농부는 농부답게, 200만원 버는 회사원은 200만원 버는 회사원답게 사는 것이 절제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의 본분에 맞는 삶을 살 때 그 사회는 조화로운 번영을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4주덕, 즉 근본이 되는 4가지 덕으로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들면서, 그 중에서도 특히 절제를 시민에게 꼭 필요한 덕으로 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저축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고 투자나 소비를 하는 것은 현명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고 있다. 때문에 주저 없이 빚을 얻어 집사고 차사고 명품을 산다. 필요 없는 전화를 수시로 걸어대느라 가계 생활비 중 통신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지나치게 높다.
우리가 빚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의 돈을 빌려 쓰고 갚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것은 ‘도덕적 해이’ 그 이상이다. 미국의 비우량주택 담보대출로 발생했던 전 세계 금융위기도 미국 국민과 금융기관의 절제력 상실과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와 ‘빚을 얻어 하는 투자’등에 대해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빚을 갚아야 할 때다. 급격히 늘어나는 가계 부채를 그대로 둔다면 이는 필시 우리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말 것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생존자체를 위협받게 될 것이다. 필자의 아버지는 한 평생 주변머리 없는 구두쇠 삶을 사셨다.
때문에 재산을 남기지도 못하셨지만 빚도 남기지 않으셨다. 필자는 요즘 들어 내 아버지의 삶이 실로 절제 있는 삶이었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절제가 우리 가족을 온전히 지켰음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2011년 봄이다. 이제 필자도 소비를 줄이고 알뜰히 저축하여 빚을 줄여 볼 생각이다. 아버지가 씨를 뿌리던 자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