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 증산 합의에 실패하면서 중동 산유국의 카르텔에 균열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OPEC은 8일(현지시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정례회의에서 석유 증산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당초 증산을 결의할 것이라던 시장의 예상을 뒤엎는 것으로, 원유 수급에 대한 인식 차가 큰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베네수엘라 등 반미 성향이 강한 국가간 대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분석됐다.
OPEC은 2008년 12월 세계 수요가 급감하자 이라크를 제외하고 일일 생산량을 2484만5000배럴로 줄인 이후 이 수준을 계속 유지해왔다.
증산을 추진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알리 알-나이미 석유장관은 이날 회의 후 기자단에게 “OPEC 사상 최악의 총회였다”고 혹평했다.
이번 회의에서 사우디는 4개 걸프국이 일일 석유생산량을 이전보다 150만배럴 추가해 3030만 배럴로 늘리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란 등 반미 성향이 강한 6개국이 이 같은 제안에 반대하면서 생산량 동결을 주장해 합의가 무산됐다. 이들 국가는 세계 석유공급량은 충분하고, 배럴당 100~115달러선인 현재 가격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증산에 반대 의사를 표시한 국가는 12국 중 이란 알제리 앙골라 베네수엘라 에콰도로 리비아 등 6개국이었다.
시아파 이슬람 맹주를 자처하는 이란의 경우 수니파 왕정이 지배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시아파와 대립하는 바레인에 군대를 지원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미국과는 핵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어온 지 오래다.
미국은 이번 OPEC 회의 개최 전 다양한 루트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증산을 이끌어 내도록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석유소비국의 입장을 대신해 공개적으로 OPEC에 증산을 요구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날 OPEC이 증산 합의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명을 통해 실망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OPEC 회원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것은 중동 지역의 민주화 운동, 이른바 ‘아랍의 봄’을 둘러싼 회원국 내의 대립도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IHS에너지의 새뮤얼 시스주크 수석 애널리스트는 "시장의 의견이 나뉘는 것이 한 요소라면 또 다른 요소는 정치"라면서 "과거에도 정치ㆍ이데올로기적 논쟁이 가열될 때면 사우디아라비아가 OPEC 내에서 최대 산유국에 걸맞은 우위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연합은 이번 회의 결과와 상관없이 석유 생산을 늘릴 방침이다.
앞서 사우디는 독단적으로 6월 산유량을 하루 최소 50만배럴씩 추가해 매일 950만∼970만 배럴을 생산해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 OPEC 회원국 대표의 말을 인용해, 이번 결과에 대해 “OPEC 생산할당제도의 사형선고를 의미한다”며 “다음 회의를 기다릴 것도 없이 원하는 나라는 어디든 증산을 가능케 한 초청장”이라고 진단했다.
OPEC의 예상외 산유량 동결로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선물 가격은 한때 전일 대비 2.8%나 치솟다 1.67% 오른 배럴당 100.74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차기 OPEC 정례회의는 12월14일로 예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