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15살을 맞은 장수기업 두산그룹. 글로벌 기업 삼성보다 더 오랜 시간 한국의 근현대사와 기업의 흥망성쇠를 목전에서 지켜보며 살아남은 두산은 현재 재계 순위 12위로 계열사 25개, 자산 26조원에 이르는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두산은 전통과 근대화가 접합하는 중심 거리인 서울 종로에서 태동했다.
◆박승직의 두산 대장정
1896년 8월 1일. 종로 4가 배오개 시장 15번지에 ‘박승직상점’이라는 이름의 가게가 문을 열었다.
1864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박승직 창업주가 10여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보부상으로 활동하다 33세 되던 해에 배오개에 점포를 개설해도 좋으리라는 결론에 꿈을 실현했다. 그 꿈이 험난한 현대사를 관통해 끈질긴 기업으로 내려오리라고는 그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택한 배오개는 18세기 전반부터 시전상인들과 만만치 않은 경쟁상권을 형성하고 있던 곳. 지리상으로도 한반도 동북부의 상품과 삼남지방의 상품이 교류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여기다 박승직상점이 개설된 지 2년 후에는 서대문에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전차노선이 착공됐고 이듬해 5월 완공됐다. 이로써 동대문 일대와 종로 4~5가는 전통과 근대화가 접합하는 중심상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두산그룹의 100년 역사는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안목의 박승직의 판단에서 태어난 셈이다. 박승직상점은 두산이 태동한 곳이자 우리나라 근대기업의 시초이기도 하다.
설립 당시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 배오개의 거상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상계에서 정평이 난 그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정부의 러브콜을 받는다. 1900년대 12월부터 1910년까지 관직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세계 경기 불황으로 한국경제에도 심각한 후유증이 몰아닥쳤다. 포목 업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상점의 채무금이 계속 늘어나자 박승직은 1920년 자신 소유의 토지를 매각해 2만700원을 갚고 상점을 주식회사 형태로 바꿨다.
◆꿈은 대를 이어 이어지고
호황과 불황, 현상 유지를 반복하며 부침을 거듭하던 박승직 상점에 대대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바로 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으로의 세대교체다. 당시 상무 자리에 오른 조선은행 출신의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은 두산 현대화의 주역이었다.
박두병은 당시 도매부와 소매부 등 총직원 30여명이던 상점 형태를 근대화된 기업체로 변신시켰다. 출근부 작성과 상여급 차등 지급 등 이었다. 성실한 직원이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한다는 것은 박두병 회장의 소신이었다.
여성의 사회활동도 적극 장려한 박두병 상무는 한 명이었던 여직원을 5명으로 확대했다.
박두병 회장은 직원들을 위한 운동부 결성, 복리후생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경영에 임했다. ‘사람이 미래다’를 기업의 존재가치로 삼고 있는 현재 두산그룹 경영철학의 발로인 셈이다.
그는 미국 등지의 면화가격을 분석하며 면포의 구입과 구매의 적기를 놓치지 않았다.
부친이 서울과 지방의 경제적 동향을 살피고 면포상과 상공조직을 통해 한일간 재계 동태를 파악했다면 박 회장은 세계 시장의 동향을 살피며 시야를 확대했다. 1938년, 박승직 상점은 창업 이후 최대 호황을 맞았다. 그해 자본금을 18만원으로 늘렸고, 당기순이익은 4만2591원에 달했다. 이듬해에는 당기순이익이 23만 6980원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면서 국내 정세는 급변했다. 회사 사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박승직상점의 순이익은 23만7000원을 이룬 1939년 이후부터 계속 줄어 1941년에는 2만8000원까지 감소했다. 이듬해에는 7만5000원으로 주저앉았다. 결국 상점은 개업 48년, 주식회사 개편 20년 만인 1945년 9월 영업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그러나 10여년간 상점에서 경영능력을 배양하며 탄탄대로를 걷던 인재로 성장한 36세 박 회장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 회장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일련의 활동을 재개한 상점을 무역업체로 키우려는 야심을 품었다.
포목상으로 외길을 걸었던 아버지가 주주로 참여했던 소화기린 맥주의 관리지배인이 된 박 회장은 무역업의 주요 인프라인 운수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아버지 박승직은 아들 두병의 첫 자인 말 두(斗)와 자의 뫼산(山)자를 붙여 ‘두산’이라는 새 상호를 짓는다.
‘한말 한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올려 산같이 커져라’라는 재화 축적의 의미를 가진 두산의 의미에는 더 중요한 3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다.
첫 째는 세대교체와 이에 따른 재산권과 사업권의 양도. 즉 박두병 시대의 도래였다.
두 번째는 사업은 번창하되 단계적인 발전을 도모하라는 의미였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로, 포목상점이라는 가업에서 새로운 시대 업종의 변화라는 기업의 중요한 전환의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두산의 의미는 100년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는 특히 경영이 부실하거나 전망이 불투명한 자회사들에 대해 과감하게 정리하고 합병해야 한다는 박 회장의 경영철학으로 내려오면서 두산의 존재를 지탱하게 했다.
정치와는 불가근 불가원의 원칙을 지키며, 사업주와 종사자 간의 화학을 중요시 한 것도 모두 창업주이자 아버지인 박승직 창업주의 신념에서 비롯됐다.
◆115년의 전통은 개혁과 현신의 아이콘으로
두산이 115년을 이어오는 동안 한시대를 호령하던 기업들은 1980~90년대에 줄줄이 추락했다. 우리나라 땅에 백화점을 처음 도입한 화신백화점, 신발 섬유 증권 철강 등 방대한 사업 영역으로 연간 매출이 2조원에 육박한 국제그룹은 1980년대에 날개를 접었다.
자동차 건설 등을 주력 사업으로 일구며 현대 삼성 등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기업으로 꼽힌 대우는 대마불사라는 말을 무색하게 하며 국제통화기금위기(IMF) 이후 해체됐다. 한보, 기아 등 내로라 하는 기업들도 이 시기 처절하게 무너졌다.
모두 시대의 흐름을 방관한 채 매출 중심의 외형확장을 추구하다 냉혹한 시장의 도전 앞에 무너진 것이다.
두산은 달랐다.
박두병 초대 회장의 장남인 박용오 전 회장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5년 구조조정에 착수해 29개에 달하던 계열사를 대폭 축소했다. 본사를 매각하고 주력사업인 맥주사업도 과감하게 분리했다.
선조가 이룩한 시대의 업적을 무너뜨리는 죄인이 될 수 없었던 후세 경영진들은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뼈를 깎고 살을 찢어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한파가 몰아닥친 외환위기에도 두산은 99년 7700억원의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부채비율도 98년 332%에서 99년 155%로 대폭 개선했다.
과감한 구조조정과 인수·합병(M&A)을 통해 중공업 그룹으로 탈바꿈했다.
두산그룹은 지난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3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등을 각각 인수하며 중공업 중심으로 기업의 체질을 완벽하게 개선했다.
선견지명과 위기를 기회로 삼은 대응력으로 두산은 개혁과 혁신 기업의 아이콘으로 부활했다.
두산의 올 상반기 매출은 12조6512억원, 영업이익 1조1687억원. 전년 동기 대비 각각 7%, 18% 증가한 수치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불안한 경영 상황에서도 시장의 흐름에 귀 기울이고 발빠르게 대응한 결과였다.
박용현 두산그룹 회장은 올해 창립 115주년을 맞아 “발 빠른 변화와 과감한 투자로 인프라 지원사업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견줄 만한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자부심이 방심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며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