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골프장. 골퍼들이 한창 플레이 중이다. 그런데 유독 한 팀이 늑장플레이를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내기 골프도 안하는데 앞 팀이 홀마다 밀리자 뒤 팀의 골퍼들은 슬슬 짜증이 났다.
캐디에게 “앞 팀 골퍼들이 혹시 회원들이니?”하고 물었다.
“아닌데요. 사실은 저분들은 소방대원들이었는데 어느날 화재진압을 하다가 모두 실명(失明)을 했답니다. 그래서 예우차원에서 골프장을 이용하게끔 골프장이 배려를 해 준 것이지요.”
그러자 한 골퍼는 “그런데 왜, 낮에 치는데?”하고 한마디 던졌다.
웃자고 지어낸 골프유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낮에 칠일이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시각장애인은 볼을 칠까. 친다. 시각장애인 골프대회까지 있다.
영국에서 먼저 시작한 시각장애인 골프는 세계시각장애인스포츠협회(IBSA) 산하에 국제시각장애인골프협회(IBGA)가 있다. 미국, 일본, 영국, 호주, 한국이 가입돼 있다.
시각장애인은 그 정도에 따라 1, 2, 3등급으로 나뉜다. 빛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면 전맹(全盲)으로 B1, B3는 약시, B2는 그 중간쯤 된다.
한국의 시각장애인 골퍼는 40여명. 남자가 32명, 여자가 8명이다. 아직 협회 사무실도 없다. 협회비를 각출해 운영한다. 사무국장도 프로골퍼 출신의 정성필씨도 자원봉사자로 일한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지난해 시각장애인 1급인 한국선수가 미국과 유럽강호들을 제치고 우승했다.
주인공은 시각장애 1급인 조인찬(59) 한국시각장애인골프연합회 이사. 지난해 11월 호주 퍼스의 콜리어파크CC(파72)에서 끝난 국제시각장애골프협회(IBGA) 호주오픈에서 정상에 올랐다. 1라운드에서 95타, 2라운드에서 98타를 쳐 합계 49오버파 193타로 우승했다. 그는 2008년 우승 이후 3년 만에 정상을 탈환했다. 장애 등급별 우승자를 가리고 전체 등급을 통틀어 최저 타수를 기록한 선수가 통합 챔피언에 오르게 되는데 조 씨는 2008년과 이번 대회에서 B2 등급으로 통합 챔피언이 올랐다.
우승 뒤에는 조력자가 있었다. 클럽을 지원한 반도골프(대표이사 강성창)와 1주일에 1회씩 무료라운드를 시켜준 베어크리크CC(대표이사 조규섭 )다.
시력이 좋았던 그는 고압가스제조업을 하던 30대 초반인 1986년부터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인천국제CC에서 친 2오버파 74타가 베스트스코어다. 핸디캡 9를 놓고 클럽챔피언대회까지 나간 적이 있다. 그러던 그가 1988년 오른쪽 눈에 황반변성(黃斑變性)이 일어나 6개월 만에 시력을 잃었고 2000년 왼쪽 눈에도 같은 증상이 일어나 2005년 시각장애 1급 환자가 됐다.
황반변성은 망막에 이상이 있는 것이라 외모는 일반인과 똑같지만 정면을 인식하는 기능이 약해 사람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특히 길을 가다가 앞에서 오는 사람과 부딪치기 일쑤다. 옆은 보이는데 앞이 안 보이는 것이다. 멀쩡하게 상대방을 쳐다보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각장애인 골프는 일반 정안인(正眼人) 골프와 규칙은 거의 같다.다만, 볼이 벙커나 해저드에 들어갔을 때 클럽을 지면에 대도 벌타가 없고 서포터라고 불리는 안내인이 경기 진행에 도움을 주는 정도다. 잘 보이다가 어느 날 앞에 캄캄했다면 아마도 ‘살 것이냐, 말 것이냐’를 고민했을 터. 그는 한동안 집안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미칠 것 같았고 점점 폐인이 돼 갔다. 안되겠다 싶어 클럽을 잡았다. 그리고 황반변성 환우회장직도 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만 하며 위기를 극복해갔다.
정안인의 생각에는 퍼팅이 어려울 것 같아서 질문을 던졌다. “홀에 볼이 잘 들어가나요?”
“거리측정이 안 돼 그린주변에서 어프로치가 가장 까다롭다. 퍼팅은 캐디가 홀과의 거리를 알려주면 무조건 직선으로 치면 잘 들어 간다”고 말했다.
골프는 다른 스포츠와 달리 정상인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다. 심신을 단련하는데 그만이다. 조 이사가 볼 치는 이유다.
☞황반변성이란
눈의 안쪽 망막의 중심부에 위치한 신경조직을 황반이라고 한다. 시세포의 대부분이 이곳에 모여 있고 물체의 상이 맺히는 곳도 황반의 중심이므로 시력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 황반부에 변성이 일어나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이다. 가장 큰 원인은 연령증가, 가족력, 인종, 흡연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