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우차는 과감한 결정을 한다. 레간자보다 한 단계 높은 고급형 중형 세단을 개발하기로 한 것. 1999년 모습을 드러낸 이 차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중형급의 명차로 남아 있다. 난세(亂世)에 태어난 탓에 탄탄대로가 아닌 굴곡진 길을 걸어야 했던 대우자동차의 마지막 왕자, 매그너스다.
◇레간자보다 커진 덩치 앞세워 30~40대 겨냥=1997년 대우자동차는 레간자의 뒤를 대신 할 21세기형 중형 세단 개발에 착수한다. 당시 개발코드명은 V200. 원래는 레간자의 뒤를 잇겠다는 계획으로 V200을 개발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계획이 수정된다. 레간자의 모습으로는 중형차 시장에서 승부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V200은 후륜 구동 중형차인 브로엄의 후속 모델로 개발됐다. 이 차의 디자인은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이끌던 ‘이탈디자인’에서 맡았다. 강렬하고도 고급스런 분위기의 네오 클래식 스타일이 디자인 콘셉트였다.
이 차에 반영된 디자인의 특징이라면 당시 대우차의 패밀리 룩과 같았던 3분할 라디에이터 그릴이다. BMW의 키드니 그릴을 연상케 하면서도 나름의 아이덴티티가 돋보이던 이 디자인은 V200에도 반영됐다. 전체적인 덩치는 레간자의 상위 모델답게 볼륨감이 더해졌다.
1997년 12월 모델링을 마친 이 차는 4기통 2.0리터 엔진을 얹고 1999년 12월 탄생했다. 레간자보다 적은 개발 예산(2200억원)이 투입된 이 차의 이름은 ‘빅 매그너스’.
차의 이름 ‘매그너스’는 ‘위대하고 강력한 중형차’를 지향했다. 매그너스는 ‘감출 수 없는 자신감’이라는 개발 콘셉트로 30~40대 남성 소비자들을 주 타깃으로 출시됐다. 특히 국산차로는 최초로 유럽과 북미 신차 평가에서 만점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김태구 당시 대우차 사장은 “매그너스는 개발 초기 단계부터 소비자의 요구사항을 철저히 분석해 제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며 “도요타 캠리, 혼다 어코드, 폭스바겐 파사트 등의 경쟁 차종 개념으로 개발했다”고 밝혔다.
회사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매각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설상가상으로 대우차 정리해고 사태가 벌어지면서 사회 안팎에서 대우차를 향한 싸늘한 시선이 이어졌다.
대우차 30여년 역사가 존폐의 위기를 맞던 그 시절, 그들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대우’라는 이름과 엔진 기술 개발 고집이었다. 대우차는 1995년부터 가로형 6기통 엔진 개발에 힘써왔다. 전륜 구동 중형차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가로형 엔진이 필수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회사를 살리기 위한 모든 협상이 어려움을 겪을 즈음, 이종대 당시 대우차 회장(법정관리인)은 뼈 있는 한마디를 외쳤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내년 농사에 쓸 볍씨마저 먹어서는 안 되는 법이오.”
이 회장이 말한 ‘볍씨’는 기술을 의미했다. 기술마저 포기한다면 회사가 넘어간 뒤에도 독자적인 차를 만들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결국 대우차는 경영의 어려움을 참고 가로형 엔진 개발을 지속하는 투혼을 발휘한다. 2002년 대우차는 총 개발비 519억원을 들여 세계 최초로 직렬 6기통 L6엔진(XK엔진) 개발에 성공했다.
L6엔진은 6개의 실린더를 일렬로 가로로 얹어 중형차에서도 전륜구동이 가능하게 했다. 실린더 크기와 실린더 간 간격을 줄여 엔진 전체 길이가 4기통 엔진보다도 짧고 부피도 최소화했다. 직렬 4기통이나 V자형 6기통(V6) 엔진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중형차 시장에 불어온 파격이었다.
첫 모델 출시 후 7년이 지난 2006년. 대우차의 마지막 신차로 출시된 매그너스는 후속 모델 토스카에게 중형 세단 바통을 물려줬다. 그리고 현재의 말리부로 맥은 이어지고 있다.
매그너스는 유독 무거운 차체 탓에 항간에는 ‘기름 먹는 하마’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으나, 우리나라 중형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명차로 기억하는 자동차인들도 많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들은 “회사의 존폐 위기 속에서도 신형 엔진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는 사실은 한국 자동차 역사의 쾌거였다”며 “난세에 태어난 비운의 명차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명차 임에는 분명하다”고 매그너스를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