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아내와 서울 한복판의 남산길을 산책하고 있다. 지금 남산은 해질 무렵 피어오르는 도시의 불빛과 단풍이 함께 어우러져 나에게 최고의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해 주고 있다.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이 풍광은 고흐의 그림을 볼 때 보다, 왕가위의 영화를 볼 때 보다 더 아름답다. 그래서 남산은 저 멀리 있는 어떤 산보다 나에게 최고의 ‘가을산’이다.
괴테는 일상의 의무와 사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잃어버린 예술혼을 되찾고자 어느 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단지 약속 차 나왔다가 잠시 찾은 남산에서 나의 사라져가는 예술혼(?)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조금만 과장해보자면 예술이 꽃피우던 18세기 이탈리아에 못지 않을 만큼 지금의 서울은 충분히 매혹적이다. 지나친 찬사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의 무겁고 날카로운 마음은 잠시 내려두고 내 안의 심미안만 꺼내서 서울을 보자. 서울 산책은 내 나라 내 말이 통해서 좋고, 긴 여행 뒤의 여독이 없어서 좋다. 그렇게 나의 ‘서울앓이’는 삼십대 중반이 넘어선 이제야 막 시작되었다.
어디 아름다운 곳이 남산뿐이랴? 나는 요즘 매일 아침저녁으로 양재천을 걸어 출퇴근을 한다. 한때는 오염이 심해 악취가 진동했던 곳이 수차례 복원작업을 거친 지금은 아이들이 뛰놀고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거니는 운치 있는 도심 속의 쉼터로 변모했다. 해질 무렵 노을에 잠겨 있는 남산이 구슬픈 트럼펫 소리와 루이암스트롱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조화를 이룬 ‘What a wonderful world'가 어울린다면, 먼 동이 트는 새벽녘에 거니는 양재천은 일본 밴드 ’Casiopea‘나 ’T-square‘같은, 정갈하고 빠른 연주의 퓨전재즈 음악이 어울린다. 특히나 이른 아침 출근길, 사방이 푸르름으로 둘러싸인 짙은 녹음 속을 산책할 때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신선한 산소로 내 몸이 채워지는 듯한 상쾌한 느낌이 든다. 오직 나홀로(?) 이 길로 출근해서 미안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예전에는 이렇게 내가 걷는 길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생면부지 가보지도 못한 유럽의 어느 골목길을 동경했고, 그곳에 가면 대단한 감성이 가슴속에서 피어날 것 같았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같이 첫눈에 반할 누군가를 운명처럼 만나 가슴시린 사랑을 할 것만 같았다. 사실 이렇게 외국에 대한 환상이 컸기에 인천공항 가는 버스만 봐도 괜시리 마음이 설레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굳이 공항버스를 보지 않더라도 파란색, 녹색버스를 타고 서울시내 어디를 가도 마음이 참 편하고 즐겁다. 어린 시절 ‘순간(the moment)’이었던 곳곳은 이제 내게 ‘히스토리(history)’가 되었고 그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나오는 서울의 향기가 나는 좋다.
런던, 파리, 로마여! 이제 미안하지만 그대들에게 잠시 작별을 고하려고 한다. 지금은 나의 오래된 친구 서울을 다시 만날 시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