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직업이 없던 이모(46)씨는 지난 2월10일 훔친 20대 의사 A(28)씨 신분증을 갖고 광주지역의 한 농협에 들렀다. 이씨는 창구에 A씨 신분증을 내밀며 통장을 만들어 달라했고, 직원은 아무 의심 없이 통장과 함께 공인인증서까지 발급해줬다.
절도 등 동종전과 22범의 이씨는 이 통장을 이용해 전국을 돌며 모두 93차례에 걸쳐 1억여원의 대출사기극을 벌였다.
40대 후반인 이씨가 창구에서 20대 신분증을 내밀었는데도, 신분증 사진 비교조차 하지 않는 바람에 범죄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이씨가 통장을 발급받은 시기는 사상 초유의 카드사 및 시중은행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 직후여서 일부 금융권 직원들의 안일한 근무태도가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광주 동부경찰서는 훔친 신분증과 신용카드로 인천, 대전 등 전국을 돌며 1억여원을 대출받아 가로챈 이씨를 붙잡아 조사 중이라고 21일 밝혔다.
이씨는 범행 당일 모 병원 의사 당직실에서 의사 A씨의 운전면허증을 훔친 뒤 곧바로 시중은행을 돌기 시작했다. 몇 차례 실패했으나 이씨는 의외로 손쉽게 피해 의사 명의의 통장을 만들었다.
동의서 한 장 없었지만 광주지역의 한 농협은 별다른 의심 없이 인터넷 공인인증서 발급을 신청한 이씨에게 속칭 대포통장을 만들어줬다.
의사 명의의 통장을 손에 쥔 이씨는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신분증 한 장으로 피해자 명의의 대포폰까지 만들었다.
피해자 명의의 대포통장과 공인인증서, 휴대전화까지 손에 쥔 이씨는 대출업체에 전화를 걸어 신분확인 절차를 간단하게 통과하고 1000만원을 빌렸다.
훔친 신용카드에서 돈을 빼내는 것도 생각보다 쉬웠다. 신용카드사 직원 행세를 하며 피해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난당한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를 물었다.
카드를 빨리 정지해야겠다고 생각한 피해자들은 본인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를 별다른 의심없이 알려줬다.
이씨는 전국 병원을 돌아다니며 93회에 걸쳐 의사와 간호사들의 신용카드와 신분증을 훔쳤고 명의를 도용해 1억600만원을 가로챘다.
경찰은 인천, 대전, 부산, 광주 등 전국 병원에서 범행했다고 털어놓은 이씨의 진술을 토대로 여죄를 추궁하는 한편, 농협 측의 과실이 있었는지도 조사 중이다.
광주지역 농협 관계자는 “우리 산하 지점이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을 오늘 보고 받아서 상황을 파악 중이다”며 “직원도 실수를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에게 통장을 개설해 준 직원은 신분증 확인을 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며 “결국 직원의 허술한 본인 확인이 이씨의 범행을 도운 셈이 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