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논의의 초점을 돌려서 고대 중국사회에서는 언제 금리(金利)라는 개념이 생겨났으며, 당시의 금리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서양의 경우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1900년까지의 수메르 문명시대, 보리 대출에 대해서는 연간 33.33%의 보리를, 은(銀)의 대출에는 20%의 은이 지불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성영모 저, ‘금리를 알면 경제가 보인다’).
동양사회, 고대 중국에서는 어떠했을까? 고대 중국사회도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곡식을 파종하는 시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이후 추수기에 이자분을 포함한 곡식을 돌려받는 곡물에 대한 대출이 초기 이자(利子) 개념의 탄생이었다. 이후 화폐가 주조되면서, 곡식을 빌려주는 물물거래 대신 화폐를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금리 개념이 정립되었다.
이러한 금리에 관한 중국 최초의 기록은, 중국 최초의 체계적 국가인 주(周: BC 1046∼BC 770)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책 ‘주례(周禮)’에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주례 천관(天官) 소재(小宰)’편에는 ‘이자에 관한 다툼이 있을 때에는 각자의 주장을 듣고, 이를 각각의 기록으로 남긴다[聽稱責以傳別]’라는 기록이 나온다.
‘주례 지관(地官) 천부(泉府)’편에는 ‘돈을 빌리는 사람은 제사의 경우에는 10일을 넘겨서는 안 되며, 초상을 치르기 위한 경우에는 3개월을 넘겨서는 안 된다[凡?者 祭祀無過旬日 喪紀無過三月]’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관청을 통해 빌려주어야 하며, 나중에 이자의 일정분을 국가에 헌납하여야 한다[凡民之貸者 與其有司辨而授之 以國服爲之息]’는 표현이 있어, 소위 사적 금융에 대한 정부의 감독 및 조세권이 행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인 ‘주례 추관(秋官) 조사(朝士)’편에는 ‘여러 사람의 돈을 모아서 금융행위를 할 경우는 법령에 의해야 하며, 이를 어길 때는 처벌한다[凡民同貨財者 令以國?行之;犯令者 刑罰之]’는 표현까지 나와 있다.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의 고대사회에 이미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금융체계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후 난세인 춘추전국시대(BC 770∼BC 221)로 들어가면 이미 고리대금업이 출현하고 있음을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관자(管子)’ 치국(治國)에는 ‘나라에서 세금 징수를 정해진 때가 없이 마음대로 하게 되면, 백성들은 연간 100%로 불어나는 고리(高利)의 자금을 빌려서 나라에 납부할 수밖에 없다[上徵暴急無時 則民倍貸以給上之徵矣]’란 표현이 그것이다.
이후 한(漢)나라로 들어서면, 고리대금업이 이미 만연하기 시작한다. 당시 이자가 원금의 갑절[倍]이거나 원금과 같은 수준[稱]임을 일컫는 ‘배칭지식(倍稱之息)’이란 단어가 이를 표현하는데, 조착(晁錯·BC 200∼BC 154)이 쓴 ‘논귀속소(論貴粟疏)’라는 글에서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고대 삼국시대부터 고리대금업이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사전(私田)을 소유한 귀족들이나 사찰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대금업(貸金業)이 행하여졌다는 기록들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에, “무식한 무리들이 이자에다 이자를 붙이니 매우 도리에 어긋납니다. 지금부터는 연월(年月)이 비록 많더라도 1전의 본전에 1전의 이자[一本一利]를 더 받지 못하게 할 것이며…”라고 하여, 이자가 원금을 초과하지 못하는 이자제한법을 건국 초기에 도입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성록(日省錄)’ 정조 3년에는 “원주의 여러 해 동안 쌓인 산채(散債)의 전 수량은 1만2000냥인데, 해마다 이식(利息) 1200냥을 취하여 장사(將士)들의 지방(支放)에 보충하였습니다”란 기록이 나와서 당시 적용된 이자율이 연간 10% 정도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방(支放)은 관아(官衙)의 일꾼들에게 봉급(俸給)을 주는 일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