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닭개장과 영계백숙

입력 2015-05-2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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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이른 더위가 순식간에 봄을 빼앗았다. 에어컨과 냉장고가 없던 시절 더위가 시작되면 우리 가족은 휴일에 태백산 자락 유원지로 나가 음식을 해 먹곤(지금은 불법이지만) 했다. 편편한 돌에 구워 먹던 삼겹살도 맛있었지만 닭개장의 알싸한 맛이 가장 진하게 남아 있다. 전날 저녁 아버지는 닭의 목을 비틀어 뜨거운 물에 데친 후 털을 뽑고 배를 갈라 내장과 발까지 손질하셨다. 고사리, 시래기를 삶고 파, 호박, 양파, 마늘 등 채소를 손질해 양념과 함께 준비하는 건 어머니의 몫이었다. 울창한 전나무 숲에서 뛰놀다 보면 닭개장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잘게 찢은 닭살을 먼저 먹은 후 얼큰한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태백산도 한달음에 뛰어 올라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담백한 닭개장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곤 하셨다.

지금은 치킨이 대세지만 닭이 귀하던 시절엔 한 솥 끓여 온 가족이 두어 끼 정도 먹을 수 있는 닭개장이 최고였다. 시골에서 지낸 것보다 서울 생활이 더 길어지면서 닭개장은 추억 속 먹거리가 돼 버렸다. 며칠 전 지인들과 닭 전문 음식점을 찾았다. 추억을 한 그릇 먹고 싶어서였다. 어린 시절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던 그맛은 아니었지만 더위쯤은 충분히 이겨낼 만한 힘이 생겼다.

그런데 음식점 벽에 붙어 있던 ‘○○닭계장’이 목에 걸린 가시마냥 불편하다. 음식점 주인은 아마도 ‘닭 계(鷄)’를 연상해 ‘○○닭계장’이라고 붙여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닭고기를 넣어 얼큰하게 끓인 음식은 ‘닭’과 ‘개장’이 결합한 ‘닭개장’이 올바른 표현이다. 쇠고기를 삶아 먹기 좋은 크기로 찢어 여러 채소와 얼큰하게 끓인 국 역시 ‘육계장’이 아니라 ‘육개장’이다. 여기서 육개장, 닭개장의 ‘개장’은 ‘개장국’에서 온 말이다. 언중이 더러 사철탕, 영양탕이라고 말하는 ‘개장국’은 개고기를 채소, 양념과 함께 고아 끓인 음식으로, 개고기 대신에 쇠고기를 넣으면 ‘육개장’, 닭고기를 넣으면 ‘닭개장’이 된다.

내친김에 닭 요리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가자. “몸보신에는 영계백숙이 최고!”라고 외치는 선배가 있다. ‘영(young)+계(鷄)’를 먹는 순간 몸이 영해져(젊어져) 힘이 솟기 때문이란다. 비교적 나이가 어린 이성(異性)의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영계’가 있어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영계의 ‘영’은 영어 ‘young’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영계는 병아리보다 조금 큰 약병아리로, 어리고 살이 부드러운 닭을 뜻하는 ‘연계(軟鷄·연한 닭)’에서 왔다. 그런데 자음동화 현상에 따라 ‘연계’가 ‘영계’로 발음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고유어인 양 굳어져 표준어가 됐다.

고교 시절 늦잠을 잔 날이면 어머니는 도시락 세 개를 싸서 골목길까지 뛰어 나와 챙겨 주셨다. “차 조심하고, 공부 열심히 해라.” 도시락엔 어머니의 손맛과 함께 자식에 대한 정이 넘쳐났다. 요즘엔 밥상을 차리는 대신 음식값을 주는 어머니들이 많다고 한다. 집밥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둘러앉아 밥을 먹는 동안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토닥이며 살아갈 힘을 얻는 게 식구가 아닌가. 먹을 것이 풍족해 배는 부르지만 가슴이 허기진 건 가족에 대한 정으로 밥상을 차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사라지기 때문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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