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화업계는 급변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사업구조 개선을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보다 앞서 적극적인 변화를 추구해 온 글로벌 유화업체들의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1990년대까지 세계시장의 패권을 장악해 온 미국과 서유럽, 일본의 기업들이 지금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면, 최근 급격히 성장하는 중국에 추격당하고 있는 우리 기업들이 나아갈 방향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서구 시장에서 아시아·중국으로 시장 이동 =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글로벌 시장은 미국과 유럽, 일본 등지에 있는 선발 업체들의 독무대였다. 이들은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하면서 과점 시장을 형성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 신흥국을 중심으로 투자가 이뤄지면서 산업의 중심축이 한국과 대만, 동남아시아 등지로 이동했다. 한국의 유화산업도 이 시기에 급속히 발전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장의 축이 중국으로 옮겨갔다. 당시 세계 화학산업 수요 중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3~2007년 21%에서 2008~2012년 59% 수준으로 급증했다. 또 ‘오일 머니’를 앞세운 중동과 ‘셰일 혁명’을 일으킨 미국 등이 시장의 중심에 가세했다.
지난해에는 유가 폭락이라는 대형 악재가 덮쳤다. 지난해 7월 배럴당 106달러(두바이유 기준)까지 치솟았던 국제유가는 올해 1월 6일 48.08달러로 급락했다. 여기에 중국 시장마저 2011년 이후 수요 둔화 추세로 돌아서자 세계 시장은 혼전 양상에 직면했다. 기존의 사업만으로는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글로벌 기업, 사업구조 관리로 안정적 성장 = 글로벌 석유화학 기업들은 이 같은 양상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 약 20년 전부터 사업구조 문제를 고민했다. 이에 과감한 사업 구조조정과 고부가가치 사업구조로의 전환, 과잉생산능력 감축 등을 추진했다.
독일의 바스프는 연구개발(R&D)과 생산설비 투자를 꾸준히 하는 한편 농업과 에너지, 신재생에너지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특히 유럽 외의 지역에서의 R&D 투자 비중을 2014년 28%에서 2020년 50%까지 끌어올려 고부가가치화를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미국의 거대 화학사인 다우케미칼과 듀폰은 기존 화학사업의 비중을 줄이고 농업바이오와 의약, 섬유사업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다우케미칼은 농업 관련 기업들을 인수하며 농업바이오 사업을 강화했고, 듀폰은 ICI의 나일론, 폴리에스터 체인을 인수하는 등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글로벌 기업의 사업 다각화 노력은 매출 비중에서 나타난다. 2011년 기준 산업은행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미쓰비시, 스미토모, 도레이의 평균 산업부별 매출액 비중은 석유화학 45%, 헬스케어 18%, 기능성 14%, 전자재료 10% 등이다. 독일 바이엘과 바스프의 경우 석유화학 30%, 헬스케어 30%, 기능성 20%, 농화학 16% 등으로 석유화학 사업의 비중이 일본과 독일 모두 45%를 넘지 않았다. 반면 국내 업체들은 석유화학 사업의 비중이 85%에 달했다.
그 결과 글로벌 업체들은 국내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바스프, 바이엘, 다우케미칼, 듀폰 등 글로벌 기업들은 모두 두 자릿수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사우디의 사빅이 21.7%, 미국의 듀폰이 15%를 기록했으며 독일 바이엘(14.1%), 미국 다우케미칼(10.8%), 독일 바스프(10.3%)가 뒤를 이었다. 반면 국내 LG화학과 롯데케미칼 등의 영업이익률은 2~5%대에 그쳤다.
◇국내 기업, 재빠른 구조 개혁 나서야 =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도 세계 선도 업체의 움직임에 맞춰 빠른 구조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김평중 한국석유화학협회 연구조사본부장은 “글로벌 기업만큼의 사업구조 개편이 이뤄지지 않은 배경에는 그동안 고실적을 이어 온 국내 업체들의 안일함이 있었다”고 꼬집었다. 기존의 높은 실적에 취해 상대적으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도 고민 중이다. 정철길 SK이노베이션 사장은 지난달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올 한해를 구조개혁의 ‘골든타임’으로 삼겠다며 “그동안 국내 유화업체들은 신성장동력 발굴과 사업구조 개편에 있어 다소 소극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SK이노베이션은 올해 비핵심자산과 유휴자산 매각을 통한 핵심 사업을 강화와 재무구조 개선에 나섰다.
LG화학도 대대적인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이를 위해 지난해 말 조직개편을 통해 기존 3개 사업본부(석유화학, 정보전자소재, 전지)체제를 3개 사업본부(기초소재, 정보전자소재, 전지)와 1개 사업부문(재료사업부문)으로 재편했다. 또 에너지저장장치(ESS)와 전기차 배터리, 수처리 사업 등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업계는 과감한 개혁만이 앞으로 유화산업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자칫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업계에 팽배하다”며 “지금이라도 미래를 내다보는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