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전선이 다시 올라와 2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30일에는 전국에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한다. 오래 가물어 목 타는 대지가 아직 해갈을 하지 못했으니 비는 더 내려야겠지만 수해는 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위에서는 비가 새고 아래에서는 습기가 차오르는 집, 이른바 상루하습(上漏下濕)의 가난한 살림은 여름을 나기가 얼마나 어려울까. 이 말은 장자 양왕(讓王)편에 나오는 원헌(原憲)의 집을 묘사한 성어다. 원헌은 공자의 제자 자사(子思)로, 논어 헌문(憲問)편에는 원사(原思)라고 나온다. 장자의 글을 요약한다.
노(魯)나라의 원헌이 살던 집은 사방이 10척밖에 안 됐다. 지붕은 푸른 풀로 이었고, 쑥대로 엮은 문은 불안했다. 뽕나무 가지를 깎아 지도리를 만들고, 밑 빠진 항아리를 창으로 삼았다. 단칸방 가운데를 헌 옷으로 막아 칸을 질러 내외가 한 쪽씩 나누어 쓸 정도였고, 지붕 위에서 비가 새 바닥은 축축했다. 원헌은 그 가운데 똑바로 앉아 거문고를 탔다.
어느 날 공자의 수제자인 자공(子貢)이 찾아와 “왜 이렇게 병색이 짙으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원헌은 “내 들으니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을 병이라 한다고 했소. 나는 지금 가난할지언정 병든 게 아니오”라고 답했다.
당나라 때의 문장가 한유의 ‘남해신묘비(南海神廟碑)’에는 상우방풍 무소개장(上雨旁風 無所蓋障)이라는 말이 나온다.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이치는데도 막지도 가리지도 못하는 낡은 집을 말한다. 비문에 의하면 남해신을 받드는 사당이 낡은 데다 제사의식도 엉망이었다. 원화 12년(817)에 노국공 공규를 광주(廣州)자사 겸 어사대부로 임명해 남방을 다스리게 하니 비로소 제대로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 남해신묘비는 그 일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fused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