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 군신(君臣)편 상에는 왕이 겸청(兼聽)을 하는 구체적 방법이 나온다. “아무리 명군이라 해도 백 보 밖에서는 들을 수 없고 담장 하나만 있어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명군으로 부르는 것은 용신(用臣)을 잘해 신하가 모든 충성을 바치기 때문이다.”[雖有名君 百步之外 聽而不聞 閒之堵牆 窺而不見也 而名爲明君者 君善用其臣 臣善納其忠也]
내가 직접 듣지 못하더라도 세상의 정직한 의견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알려주는 사람을 신하나 간부로 쓰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성신(誠信)으로 성신을 잇고 선량으로 선량을 전하는 까닭에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臣以繼信 善以傳善 是以四海之內 可得而治] 그렇게 하려면 신하의 장·단점을 두루 꿰고 그 한계 또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적재를 적소에 앉힐 수 있다.
이 글에 나오는 청이불문(聽而不聞)은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한다는 말이지만 ‘대학’ 장구 전 7장에서는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를 일러 몸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在正其心]
이 문장의 앞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소위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는 것은 마음에 노여워하는 바가 있으면 바르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바르지 못하며,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바르지 못하고,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바르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所謂修身 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