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인 관점에서 산업은행의 기능은 시장의 원리에 따라 점차 축소돼야 한다.”
하태형 현대경제연구원 고문은 산업은행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같이 진단했다. 공적자금(정책자금)을 투입하는 과정에서 국내 부실기업 대부분을 끌어안고 있는 산업은행이 이런 기능들을 조금씩 줄여나가고, 결과적으로는 시장에 환원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 고문은 “원론적인 얘기를 한다면 산업은행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국책은행이 특정산업을 도와준다는 의미로 비쳐질 여지가 충분하다”면서 “과거 우리나라의 중후장대한 산업정책과 맞물려 산업은행이 나름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현 시대의 조류에는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주로 조선과 철강, 건설산업 등 기간산업 위주로 포트폴리오가 구성돼 있다. 이런 산업에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정책적인 자금 지원이 필수적인 요소였고, 산업은행이 이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향후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산업군이 재편돼야 하고 그에 맞는 정책금융 또한 재정립돼야 한다는 게 하 고문의 지론이다.
그는 “창조경제, 즉 벤처나 모험자본 위주의 기밀하고 빠른 속도의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재편돼야 한다”면서 “중후장대 산업 위주의 기업 구조조정을 신속히 단행해 관련 정책자금 집행을 점차 줄여나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현재와 같은 산업은행의 정책적인 기능은 많은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하 고문은 지적했다. 그는 “정책적인 자금은 정책적인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며 “결국 자금 공급자(산업은행)건 수요자(기업)건 정부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는 정치권과의 불필요한 유착을 낳는다”면서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건강한 경제 발전을 위해서라도 이 구조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의미에서 하 고문은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기업 구조조정 전문회사의 방향성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전달했다. 그는 “현재 산업은행이 맞고 있는 기업 구조조정의 헤드쿼터 역할은 시장의 원리에 역행하고 있다”며 “기업 구조조정은 사모펀드 등 전문기관이 담당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제시했다.
김미애 한국경제연구원 박사 역시 산업은행 등 채권은행을 통한 기업구조조정에는 한계가 많다는 지적이다. 김 박사는 “시장의 자율적인 구조조정 체계를 특별한 국가적 요구에 의해 관계 당국이 금융기관, 즉 산업은행 역할에 개입할 여지가 존재한다”며 “기업구조조정의 방향이 외적 개입 없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구조조정의 경험과 노하우가 충분한 인력, 그리고 이를 위한 조직 운영 시스템이 미흡하다”면서 “기업이 직면한 경영적 상황과 전망 등에 대한 전문적 판단을 위해서는 관련 업무의 집중과 전문적 추진이 필요하다. 시장친화적인 기업 구조조정 전문기관이 필요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이 같은 산업은행의 정책적 역할 축소는 시장 경제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 고문은 “산업은행의 정책금융 기능 자체는 시장의 원리에 의해 축소되는 게 맞지만, 장기적인 방향성을 갖고 시장의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점진적으로 이뤄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