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전 원장은 기업공개(IPO)를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증권감독원의 설립 시기인 1970년대 중반에는 기업들이 IPO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IPO를 하면 기업의 세금 부담을 줄여줬다. 그러나 당시 회계가 불명확했던 기업들은 선뜻 회사를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홍 전 원장은 취임 직후 IPO를 역점사업으로 추진했다. 그는 공개 대상 기업에 공문을 보냈으며 회사 대표들과는 간담회를 하는 등 공개 촉진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홍 전 원장은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업공개는 대외 경쟁력을 강화하고 세제 혜택을 받는 경제적 측면에서만 강조되는 것은 아니다”며 “더욱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자본 참여 형태로 기업과 인연을 맺어 국민과 기업이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실천되지 않는 것을 비판한 대목이다.
홍 전 원장은 가족 경영도 한계가 있을 것으로 진단했다. 그는 1978년 인터뷰에서 “지난 10년간 우리 증권계는 양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뤘지만 질적 발전은 충분하지 못했다”며 “투자자가 믿고 투자할 수 있는 여건도 미흡하다. 증권사들은 증시 확대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태세도 갖추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홍 전 원장은 취임 첫해인 1977년 49개의 기업을 IPO에 참여시키는 성과를 냈다. 당시 이들 회사는 IPO로 441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이 중 14건, 136억원은 건설업종이 차지했다. 국내 건설사의 해외시장 진출 호재를 반영한 실적이다.
이듬해에도 이 같은 기조는 이어졌다. 1978년 33개의 기업이 IPO에서 415억원을 조달했다. 이 중 15개사, 256억원이 건설업종이었다.
그러나 홍 전 원장의 IPO 유치 노력에 호황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8년 12월 29일 범화건설은 상장 6개월 만에 부도를 냈다. 당시 범화건설의 부도액은 1억800만원이었다. 이 회사는 거래당국에 부도액을 제때 신고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투자자들의 건설업종 투자심리가 위축됐다. 1979년에는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IPO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증권감독원 출범 2년차까지 호황을 보인 IPO는 1979년에는 5건에 그쳤다. 이어 1980년 1건, 1981년 2건, 1982년 0건을 각각 기록했다.
홍 전 원장은 이같이 대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는 책무를 져야만 했다. 1980년 임기가 끝난 그는 연임을 고사했다. 그러나 대안이 없었다. 1980년 2월 연임한 그는 “축하한다”는 말보다는 “고생스럽겠다”는 인사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증시의 급성장과 그에 따른 반작용, 영아가 겪는 고열을 홀로 받아낸 그였다.
홍 전 원장은 여러 신설조직의 산파 역할을 했지만 그 무엇보다 “증권감독원의 출범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회고한 기록을 남겼다.
홍 전 원장은 1980년에는 정례검사가 아닌 불시검사를 담당하는 특별검사반을 운영한 성과도 냈다. 당시 증권감독원에서는 일부 상장사들이 일부러 검사 공백 기간을 노려 사고를 내는 사례를 적발했다. 일부 회사들은 주주총회 전에 특정 주주와 담합해 배당률을 줄이기도 했다. 이를 막고자 홍 전 원장은 특별검사반을 가동, 자본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증권사에 환매 업무를 허용한 것도 홍 전 원장이다. 그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환매 업무 허용은 증권사의 수익을 개선하기 위한 획기적 조치였다”며 “이는 증권사의 경영 건실화 효과는 물론 일반투자자에게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내 증권사들의 당기 순이익은 홍 전 원장 취임 첫해인 1977년 60억300만원이었다. 그의 퇴임 직전인 1981년에는 174억1800만원으로 2.9배 늘었다.
홍 전 원장은 1982년 2월 초대 증권감독원장에서 퇴임한 뒤 삼미종합특수강 회장,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2008년 7월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