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정우 칼럼] 여성 지도자가 남긴 빚

입력 2016-11-2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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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연구원 초청연구위원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접하면서 4년 전 지역을 누비며 박근혜 후보 지지를 호소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나는 한국 역사에 첫 여성 대통령을 만들어 세계 속에 한국인의 남다른 모습을 보이자고 역설했다. 사실 아시아의 민주국가 가운데 몇 안 되는 여성 지도자를 선출한 한국은 바깥세상을 향해 우쭐거릴 만했다.

박 후보는 여러모로 한국 남성들조차 앞세울 만한 여성이었다. 절제된 언행과 몸에 밴 지도자의 기품이 있었다. 조신한 여성다움도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때 이미 소수의 편한 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선거판에서 뛰고 있는 이들을 실망시키진 않았다. 많은 국민들이 박 후보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손 한 번이라도 잡아보려 했다. 붙들고 울먹이는 지지자들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이젠 너무나도 달라졌다. 수많은 국민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어버렸다. 실망과 분노가 넘치고 있다. 이에 더해 나에겐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사회에서 한동안 여성 지도자를 내세울 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그렇다. 우리 사회 곳곳엔 능력 있는 여성들이 많다. 하지만 국가를 통치하는 자리에 내세울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오늘의 사태는 그런 가능성마저 내치고 있다.

성공한 여성 대통령, 자랑스러운 여성 지도자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땅의 딸들이 꿈을 갖고 모두가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땅의 남자들 역시 우리 여성의 우수함을 경험으로 확인하길 기대했다.

박 대통령이 비서진과 장관들 상당 부분을 여성으로 채우길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잘난 여성 기용에 인색한 대통령이었다. 캐나다의 젊고 잘생긴 저스틴 트뤼도 총리가 선거 공약대로 각료의 반을 여성으로 임명하는 걸 보면서 정말 부러웠다. 정치인 아버지를 닮아 말도 잘하는 그를 올해 초 스위스의 다보스포럼에서 볼 수 있었다. 각료의 절반을 여성으로 채운 데 대한 질문에, 그의 답변은 명료했다. “이제까지 캐나다 여성들의 능력과 자질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더 이상 질문이 이어질 수 없었다. 이런 게 지도자의 철학이다.

나는 우리의 여성 대통령이 그러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 대통령은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이들 위에 군림하는 왕조시대 군주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 여성들의 잠재력이나 역량에 대해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지도자였다.

우리 사회도 첫 여성 지도자를 만나 능력 있는 여성들이 사회를 위해 제대로 기여하는 모습을 확인해야 마땅했다. 각종 경쟁과 시험에서 여성의 우수성을 확인하면서도 내심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대통령은 줄 수 있었다. 이제 그런 기대는 사라졌다. 오히려 탐욕스러운 강남 아줌마에게 휘둘려 대통령직을 불명예로 마감하는 첫 여성 대통령으로 기록될 처지다.

그래서 대통령의 가장 큰 빚은 한국의 여성들에게 진 것이다. 이번 사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여성이 주인공이고 남자들은 모두 하수인이다. 이런 꼴을 보고 있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 생각은 어떨까. 여성 혐오나 폄하, 기피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세계적인 대기업 임원 분포를 분석한 경제지 포춘은 여성 임원이 많을수록 그 기업은 덜 부패하고 생산성이 높다는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여성이 가진 포용성과 따스한 품성이 조직 운영에 긍정적 역할을 한다는 분석도 새롭지 않다. 게다가 국내외 곳곳에서 활동하는 한국 여성들의 재능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며 우리의 역량 있는 여성들이 주눅 들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남성들 역시 한국 여성들의 역할과 기여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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