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블랙리스트 사건의 원조는 부산의 신발업계를 휩쓸었던 노동계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1991년 9월 부산의 금호상사의 전산실에서 해고노동자와 민주화운동 진영 인사 8000여명의 명단이 발견되었다. 당시 블랙리스트는 전국의 신발업체들이 함께 작성하고 공유하던 자료였다. 목적은 분명했다. 87년 6.29 선언 이후 민주화와 노동권 보호를 주장하는 자들이 회사에 채용되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부당해고 된 노동자의 취업을 막는 불법 행위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 인권을 탄압하는 장치였던 이 리스트의 작성에는 경찰, 노동부, 현재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기업들이 참여했다.
세상은 개방, 공유, 소통, 협력의 3.0 시대로 진화했는데, 한국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갔다. 오늘날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과거의 그것보다 더 충격이 크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가정보원, 그리고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연루된 흔적들이 포착되고 있다. 심지어 그 대상이 9000명이 넘는 문화예술인이다. 사회가 허용하는 한, 혹은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수준에서까지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하는 이들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 제재 방식도 비열하다. 이들에 대한 국가차원의 지원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한편으로는 문화융성을 외치는 정부가, 예술인들의 삶이 궁핍해 예술인복지재단이 필요한 수준의 문화기반을 갖춘 나라에서 벌이는 이 행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블랙리스트는 있는데 이걸 만들었거나 이를 지시했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떳떳하지 못할 일을, 국가기구를 이용해 저지르고, 그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후안무치를 우리 국민은 수년째 지켜보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블랙리스트가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음습하고 후진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과연 블랙리스트가 이것 뿐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기업은 이러한 블랙리스트 문화에서 그 책임이 자유로울까? 작년 말 대법원에 의해 그 실체가 인정된 삼성그룹의 ‘노조와해 전략 문건’에는 노조 설립 시 노조원의 비위 사실을 추적·수집하고, 설립 주동자를 해고하고, 고액 손해배상과 가처분 신청을 검토하는 등 노조의 결성과 활동을 무력화 하기 위한 계획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삼성판 블랙리스트라 할 법하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가 삼성그룹에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다른 어떤 기업과 사업장에서 이와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이미 매우 광범위하게 퍼진 문화일지도 모른다. 30대 그룹의 계열사 252개 중 노조가 있거나 활동하고 있는 기업이 절반 수준에 그친다는 사실도 이와 관련이 깊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조직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제표준화기구 ISO의 사회적 책임 가이드라인인 ISO26000은 "근로자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증진 또는 단체교섭을 하기 위해 자신의 조직을 구성 또는 가입하는 권리를 항상 존중"할 것과 더 나아가 "결사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금지된 특정 산업구역에 자회사를 두거나 이 구역에 있는 회사로부터 조달받은 것을 피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후자의 조항이 강력하게 적용된다면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된다. 이제 우리 기업도 최소한 노동자를 통제와 장악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직 내의 비판과 조직원의 권리주장을 분열행위로 낙인찍는 문화도 버려야 한다. 대신 강력한 토론문화를 정착해야 한다.
블랙리스트는 통제하고 장악하겠다는 밀실의 욕망이 낳은 부정의한 결과물이다. ‘통제와 장악’이 성장과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은 과거의 것이고, ‘부정의’한 것이 애국심과 애사심으로 합리화될 수 있다는 믿음은 허위다. 우리가 내딛어야 할 미래의 방향은 명확하다. 개방, 공유, 소통, 협력. 정부3.0 공식 웹사이트에 잘 표현되어 있다.
고대권 코스리 미래사업본부장 accrea@kos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