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군군 유씨(河源郡君 柳氏, 1079~1117)는 고려시대의 귀족부인이다. 평범한 귀족부인의 이야기가 역사서에 실리기는 어렵다. 이런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묘지명이다. 묘지명이란 죽은 이의 일대기를 돌 같은 데 써서 무덤 속에 함께 묻은 것으로, 고려시대 여성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씨 부인의 본관은 정주(황해북도 개풍군)이며 아버지는 유홍,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황의 딸이다. 언니는 숙종의 왕비인 명의왕태후이다. 군군(郡君)이란 귀족부인들에게 주어지는 벼슬(외명부) 칭호이며, 그녀의 본관 정주의 별칭인 하원군을 써서 하원군군이라 한 것이다.
유씨 부인은 1103년 25세로 여진족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윤관 장군의 아들 윤언영과 혼인한다. 25세라니! 우리는 전통시대의 혼인이라면 무조건 꼬마신랑, 꼬마각시를 연상한다. 그런데 실제로 고려 전기 귀족부인들의 혼인 연령을 보면 물론 15, 16세에 혼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24, 25세에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는 엇비슷한 집안 간에 혼인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마땅한 상대가 없어 혼인이 늦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묘지명에 의하면 그녀는 친가와 시가가 모두 대단한 집안이었음에도 부인으로서의 몸가짐을 조용히 가졌고, 스스로 교만하지 않았다 한다. 또 집안 살림을 잘 다스렸으며, 내외 친척을 대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한다. 여기서 고려시대 여성에게 요구된 부덕을 알 수 있다. 즉 온순하고 겸손한 태도와 친족과의 화목, 집안일을 잘 처리하는 것 등이다.
아내와 주부로서의 역할을 다하던 그녀는 1117년 갑자기 병이 들어 그날로 집에서 숨을 거뒀다. 나이 39세였고, 자식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녀의 남편 윤언영의 존재이다. 사료에 의하면 윤관의 아들이 5명인데, 이 중 윤언영이란 이름은 없다. 그런데 윤관의 셋째 아들인 윤언식의 묘지명에 보면, 그가 처음 명의왕태후의 동생인 유씨와 혼인했는데 자식도 없이 일찍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따라서 윤언영이 윤언식으로 개명을 한 게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윤언식은 1087년생으로 유씨부인과 무려 여덟 살 차이가 난다.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남편 연상혼이었기에, 두 사람이 부부였다고 보기 어렵다. 때문에 윤언식은 윤언영의 동생이었으며, 형제가 유씨부인 자매와 나란히 혼인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유씨부인은 유홍의 넷째 딸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더 놀라운 것은 윤언식이 유인무의 딸과 재혼했는데, 그 역시 명의왕태후 친족이라는 점이다. 즉 파평 윤씨와 정주 유씨 간에는 몇 겹으로 중첩되는 혼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유씨부인은 고려 전기 최고 귀족가문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묘지명은 당대 여성의 삶과 부덕뿐 아니라 귀족들의 혼인 행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